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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제일이라 (고전 13:1-7, 신 0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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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랑의 시편" 또는 "사랑의 찬가"라 불리우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우리는 이제까지 몇 차례에 걸쳐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 해 아무리 설교를 하여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듣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 는 것이기에 백번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번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 쨋든 오늘은 이 사랑의 장 결론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 이라." 사도 바울은 사랑과 더불어 믿음과 소망이 영원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부분적인 것이요, 불완전한 것이며 어린 아이적 일인데 반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온전한 것이며, 장성한 사람의 일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하고 영원한 것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것 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중세기 이탈리아에 믿음이 돈독한 성주(城主)가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믿음의 공을 세웠으면 하고 골똘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가지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과 더불어 만찬을 나누실 때 사용한 금잔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성주는 당장 많은 돈을 준비해서 말을 타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문을 나서 려 할 때 그 성문 앞에서 한 나병환자 거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주에게 구걸할 때 마지못해 금화 한 닢을 꺼내 땅바닥에 던지며 말했습 니다. "자, 이걸 가지고 떠나라. 나는 지금 내 인생의 큰일 때문에 너를 돌 볼 겨를이 없다." 이때부터 수 십년 동안 성주는 예루살렘은 물론 이탈리아 구석 구석을, 그리고 멀리 애급과 사막에까지도 금잔을 찾기 위해 뒤지고 다녔으나 헛수 고였습니다. 드디어 돈은 떨어지고 머리에는 하양 서리가 앉게 되었습니 다. 그는 지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용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떠나던 때와는 달리 낡은 옷에 지팡이를 짚은 쓸쓸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문 앞에 다 달았을 때였습니다. 그의 앞에 다시 그 나병환자 거지가 나타나 구걸하였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겪은 고생으로 이제 그의 오만은 사라지고 사랑이 솟아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른 빵 한 조각 밖 에는 거지에게 나누어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그는 빵의 절반을 잘 라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있던 쪽박을 들고 옹달샘으로 가서 물 한바가지를 길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돕는 것이 변변치 못해 미안하오. 하지만 이것이 내 전부인 것을 어떡하오." 그러자 갑자기 나병환자 거지가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들어라. 금잔을 찾으려고 아무리 헤매어도 소용이 없다.

샘물을 길어온 그 보잘 것 없는 쪽박이 나의 성배이다. 네가 떼어준 빵이 나의 살이며, 이 물이 내 피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와 더불어 나누는 식 사야말로 진정한 성찬이다." 이 성주에게는 믿음도 소망도 있었지만 그에게 사랑이 솟아났을때 그 사 랑 안에서 믿음과 소망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는 것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다고 할 때 "항상 있다"는 현재형입니다. 그 것은 이 세 가지가 계속하여 끊임없이 현재한다는 뜻입니다. 예언이나 지 식은 부분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므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지만 그 계시를 바탕으로 한 믿음, 소망, 사랑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이 셋을 함께 묶어 기록하고 있습니 다. 특히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에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 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이 셋은 서로 뗄 수 없는 복음의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희랍어 원문으 로 보면 "항상 있다"는 동사가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 다. 믿음, 소망, 사랑을 셋으로 보았다면 복수형 동사를 써야 할텐데 단수 형으로 쓴 것은 그것을 하나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가지 요소는 따 로 따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고리라고 바울은 생각했던 것 같습 니다. 사실상 이세 요소는 불가분리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모두가 하 나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심으로 주어진 열매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으로 우리 속에 주어진 복음의 요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자리잡게 된 성 품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가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 랑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향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세 요소는 각각 다른 것 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 복음의 세 요소는 다같이 점점 더 자라가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 습니다. 처음 우리가 믿음을 가졌을 때는 그 믿음이 보잘 것 없지만 점점 노력하는 가운데 그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은 양으 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질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하신 것은 크기와는 상관없이 질적으로 성숙한 믿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는 어떤 유혹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능력있는 일군이 됩니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소망 도 자라납니다. 믿음이 자라는데 비례해서 소망도 자란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베드로전서 1장에 "산 소망"이라고 말한 것은 소망의 성숙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보적인 믿음에서는 우리의 소망 자체도 분명치 않습니 다. 막연하게 죽으면 천당간다는 생각 정도입니다. 그 소망이 내게 역동적 인 힘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소망이 자라면 나의 삶 전체를 살아 움 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의 소망은 과연 얼마만큼 성숙하여 있을까요 의외로 우리의 소망은 보잘 것 없을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이 역동적이지 못한 것은 소망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 문입니다. 믿음과 소망처럼 사랑도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본능적 으로 사랑을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물적인 본능에 불과한 것입 니다. 우선 그 사랑이 아가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따라서 우리가 사랑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위로부터 온 것으로 우리 속에서 점차 자라가는 것입니다. 앞서 본대로 사 랑은 투기와 자랑과 교만과 무례와 자기 유익 추구와 같은 것을 벗어버릴 때 점점 충실하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란다는 점에서 이 셋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 려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 소망도 자라고 사랑도 자라나게 되는 것이라 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셋은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셋은 하나이면서도 각각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 나님의 구원의 모든 역사를 받아드리는 창구라고 한다면, 소망은 그 창을 통하여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고, 사랑은 그 구원의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추구할 것은 일시적인 방언이나 신유나 예언이나 지식이 아니라 항상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을 힘써 자라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사실상 믿음과 소망은 사랑을 불러오고 자라게 하며 충실하게 해 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이 충만한 사람은 믿음과 소망도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 사랑을 자라게 하려다 보면 자연 믿음과 소망도 자라게 마련인 것입니 다. 이제 우리는 성숙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우리 가운데 있도록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지금 우리에게 있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 과 소망도 중요한데 왜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 의 역사가 사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였 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 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 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므로 해서 믿음도 소 망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믿음이나 소망보다 더 큰 것입니 다.

둘째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큰 것 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룩하시는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모두가 사랑에 기초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삶 전체가 사랑에 기초할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사랑이이 우주에 충만하여 있다는 것 이며, 모든 존재와 삶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세계가 창조되었 고 사랑으로 그 세계가 움직이며 보호받고 있으며, 사랑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탐구하는 철학이나 우주를 탐구하는 과학이 사 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그 세계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요 세계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풀어지지 않는 문 제는 없습니다. 오늘 이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사랑을 떠났기 때문 입니다.사랑의 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모든 문제의 해 결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 역사를 치료하는 만병통치의 약입 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 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소망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그 범위가 넓기 때문에 더 크다고 하겠 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 나님께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깊이 관계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21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 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 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 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그 범위가 크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입니다. 끝으 로, 사랑은 믿음과 소망이 줄 수 없는 감동을 주기 때문에 더 크고 중요합 니다. 믿음과 소망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감동적이기는 합 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온갖 박해와 마침내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간다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 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크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은 대개가 사랑 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가 있게 마련이고 그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함으로 그 사랑이 빛을 발하게 되기에 언제나 감동적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고든(Earnest Gorden)이 쓴 콰이강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때 일본군에 포로된 영국군들이 수 용소에서 집단 생활을 하면서, 전략적인 목적으로 건설되는 콰이강을 가로 지르는 철교 건설 공사에 강제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로 가운데 Angus라는 뚱보가 있었습니다. 남보다 배나 음식을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 하는 대식가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의 절친한 친구가 정글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

가 없는 극한 상황이었습니다. 고열로 신음하며 날마다 그 몸이 쇠약해져 죽어가고 있는 친구를 본 Angus는 마침내 속으로 결심하고 그 친구를 살리 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자기가 먹어야 할 음식을 친구에게 주고 또 자기가 덮어야 할 담요를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의 이런 극진한 간호 덕 분에 그 친구는 점차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지만 피곤과 허기에 지친 Angus는 마침내 졸도하게 되고 생명을 잃고 맙니다. 의사가 검진한 결과 그는 병이나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굶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중대원들은 깊은 충격을 받고 자신들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후부터 중대원들 은 협동정신을 발휘하여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므로 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 지그 중대원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살아 남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가리켜 "콰이강의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감동케 하 는 것은 사랑이 바로 위대한 삶의 근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 가 내 속에 잠재해 있는 사랑을 흔들어 깨울 때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며, 이 우주의 원 리이며,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이 의미를 잃게 되며 사랑이 없으면 점점 더 파괴적인 인간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사랑이 꽃피고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때 우리의 삶은 건강하고 보람있고 기쁨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 까지 피곤하게 뛰어 다니지만 저들이 사랑을 갖지 못하였기에 피곤에 찌들어 그들의 삶은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면 아무리 뛰어도 피곤치 아니하고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활기에 넘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자는 모두 고아와 같습니 다. 사랑을 받지 못한 고아들이 사랑을 알지 못한채 파괴적인 성격을 간직 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을 모르는 현대인들은 결국 폭력적이고 스스로를 파 멸의 구덩이에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병든 세계와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가페 사랑 밖에 없습니다. 사랑만이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약입니다. 사랑만이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 는 유일한 약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을 간직하므로 여러분의 삶을 건강하 게 하십시요. 그리고 그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십 시요. 그러면 오늘 우리 사회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과 소망을 증거하는 길은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말로만이 아닌 사랑의 행 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 다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사랑의 풍성함을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그 사랑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랑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하며 다른 사 람들을 구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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