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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 덜 깬 소명자 (욘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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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이 요나에게 들려 왔습니다. "너는 저 앗수르의 스 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외치라. 망하게 된 니느웨 백성을 구하 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요나는 몹시 당혹스럽고 갈등이 컸습니다. 앗수르 나라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많은 침략과 괴로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민족을 향해 구원의 복음을 외치라고 하시니 요나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분부와는 달리 다시스로 향해 달아나고 있었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를 그대로 방치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의 향해길에 커다란 풍랑을 일게하셨습니다. 1장 4절을 보십시오 "여호 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다시 한번 기회를

2장 1절로 9절에 보면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의 본심은, 싫었지만 하나님께 등떠밀려 결국 니느웨 밸성들에게 외칩니다.

 "니느웨 시민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당신들이 회 개하지 아니하면 사십일 뒤에 이 성읍이 망합니다. "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는 요나의 입장에서 어떤 것이었겠습니다만 이런 요 나의 모습은 위선자의 외침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우선 하나 님의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예레미야와 바울처럼 말 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소원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소명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런 데 요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요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메시지를 받은 니느웨 사람들은 왕으로부 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짐승엑도 금식시키면서 회개운동을 전개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저들이 회개하 는 모습을 보시고 그 뜻을 돌이켜 니느웨를 용서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을 알게 된 요나는 몹시도 불만스러 웠습니다. " 하나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토록 당신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저 이방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다니요. 차라리 저를 죽게 해주십시오." 그 는 하나님께 강력하게 항변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항변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를 지켜보려고 니느웨 동편 언덕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그늘 아래 앉아 있었습 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참으로 이상한 사람 도 다 있다.아무리 원수관계라고 해도 그토록 미워 할 수 있겠나"라고 속 단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이스라엘 을 침략하고 괴롭힌 민족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요나가 이 메시지를 전한 뒤 불과 40년 못되어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공에 의해 망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하나님

오늘에 사는 우리들로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왜 불과 40여년 뒤에 자기의 백성을 침략해서 망하게 할 그 민족을 구하려고 그토록 애쓰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지난 날 우리나라가 왜정으로부터 해방된 직후 하나님께서 어느 목 사에게 "너 지금 도쿄에 가서 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 내가 도쿄 시민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라고 메시지를 주셨다며, 당시 우리 민족 감정 으로 "예 가겠습니다"하고 기꺼이 나설 목사가 있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죄악으로 인해 파멸될 수밖에 없었던 니느웨 성읍이 선지 자의 메시지를 받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서, 그 전달을 한 장본인이나 그것을 읽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깊 이와 폭을 새삼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본문의 요나는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이 이상한 분이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 왜 이도성의 이방 인들, 우리들을 괴롭히는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까 차라리 나를 죽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떼를 쓰고 있습니다.

 왜 요나가 이런 몸짓을 했을까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편애 없으신 사 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고 그밖의 이방인들은 미워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은 내 울 안에만 복을 내리시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누리에 편 만히 계시고 악인의 밭에나 의인의 밭에난 똑같이 비를 내리시듯 고루 사랑 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의 우리들만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교회 밖에 저희들도 똑같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다 만 죄를 미워하실 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씀하 셨는데 그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영역을 뜻합니다. 사단의 미혹을 받고 사 는 믓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를 구언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요나는 이편에 없으신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두번째, 요나가 왜 웃어야 할 자리에서 울고 감사해야 할 자리에서 분해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부르셨는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아니면 니느웨 성을 구원할 다른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없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고집하셨을까요 바로 요나의 그 민 족주의, 선민 우월주의 감정을 깨뜨려 주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었습 니다.

 한번 더 생각했더라면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헤아 리게 하셨습니다. '왜 나를 여기에 세워주셨을까 나 아니면 이 교회 유지 못하나 나 아니면 이 교회 부흥 안되나'그럴 수는 없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향해서 네가 이때에 잠잠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쓰셔서 이 백성을 구원하시겠거니 너와 네 아비집은 망하리라고 말했습니 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의식을 깨지 못하면 경웨 따라 하나님의 의도를 오 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를 쓰더라도 그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른 막대기를 가지고도 그의 일을 하셨고, 나귀 턱뼈를 가지고도 큰 일을 하셨습니다.

 요나가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왜 여기에 세우셨을까' 하고 심각하게 생 각했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감격하며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조금도 자존심을 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를 향한 원망을 포기하지 아다은 채 하나님의 밀물처럼 밀어붙이는 소명 앞에서 주 체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밀리기만 하였습니다.

 요나 1장 6절에 보면, 이방인 선장이 요나에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 어나서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것은 이방인 선장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충고였습니다.

 또 한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같혀서 철저히 회개하였습니 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아직 회개할 기회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 성의 백성들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소명의식이나 자 원하는 마음으로 나선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기 고집과 감정이 살 아 있었으며, 자기 나름의 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외 침은 단순한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사라이 잠꼬대하는 것처럼 자의식이나 붇별 없이 "니느웨 백성이여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만일 사랑과 소명을 가지고 외쳤더라면 니느웨의 변화 앞에서 얼마나 기뻐 춤을 추었겠습니까 그는 다만 덜 깬 소명자의 잠꼬대 같은 소리만 외쳤습니다.

 요나가 환난을 겪으면서 그의 소명의 잠을 깨우긴 했습니다만 아직 덜 깬 소명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외침과 감정은 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외침의 결과 앞에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잠이 덜 깬 소명자

오늘을 사는 우리 가운데도 아직 덜 깬 소명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 들일까요

첫째, 용서와 미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입니다. 용서하려면 깨끗하게 과거를 지우는 것이지, 용서하려면 깨끗하게 과거를 지우는 것이지 용서했 다면서 지난 감정을 품고 있다면 되겠스니까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노여움을 품었을 때에, 용압의 중재로 압살 롬을 예루살렘 문안에까지는 들여좋았지만 이년 동안 같은 성안에 살면서 그 아들을 만나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압살롬이 "왜 나를 불러들였소. 이런 대로 살려면 차라리 죽는게 낫 겠소!" 하고 항변했습니다. 용서했다지만 바로 이것이 반용서의 비극입니 다.

오늘 우리들도 이웃을 용서했다면 그 감정이 원상회복되어야지, 여전히 자신의 자존심을 돋히 살리면서 기도의 장애나 피하려고 적당히 마찰이나 피하려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선하지 못합니다.

 둘째, 덜 깬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자기 욕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사람 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니느웨 구원인데 요나의 욕심은 니느웨 멸망이었습 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 앞에 달리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죽기를 자원했습니다. 그만큼 니느웨 구원은 자신에게 괴로움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되어진 뜻 앞에 단호하게 자기의 욕심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어느 날 갑자기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통지를 합니다. 충격이요 당혹이었습니다. "나는 사내를 모릅니다"라고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가브리엘로부터 " 이 일은 사람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고 다시 설득을 당하였을 때, 마리아는 '주의 계집조이오니 말씀대로 제게 이 루어지이다." 하고순복하였습니다.

 이 고백 한마디는 파혼, 모멸, 죽음 까지도 각오한 입장에서라고 이해할 때에 마리아의 놀라운 순종을 이해할 때에 마리아의 놀라운 순종을 이해하 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앞에 자기 욕심을 포기하면 망할 것 같지만 흥합니 다.

 지난 2000년 인류역사 가운데 마리아만큼 영예스러운 여인이 어디에 있었 습니까 바로 이 마리아의 본보기와 같이 살면 우리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생활하면서 괴로운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분명히 내 영적 감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자신의 입지 때문에 또 이해문제 때문에 그것을 포기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까지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도 여전히 나의 욕심의 자리에 연연하고 집착한다면 그 사람 은 덜 깬 자의 소리밖에 낼게 없습니다.

 셋째, 소명의 길과 제 길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을 덜 깬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신 길과 요나가 도망친 다시스의 길은 서로 상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충돌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그토록 초일적 힘을 주셨지만 삼손은 그 힘을 감정풀이와 여자에게 쏟았습 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이스라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제 향락의 길을 고집했습니다. 결국 연자멧돌을 돌리는 짐승꼴이 되었습니다.

 따르는 위험들

목사, 장로, 성가대, 교사와 같은 소명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하나 님의 교회를 보존하고 그 힘으로 이 사회를 구원하도록 하신 자리입니다.

행여 우리들이 교권이나 내세우고 세속적 습성을 따라 엉뚱한 길에 섰는지 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주의 성령이 교회를 향하여 이르시는 말씀 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결국 덜 깬 소명자는 어떤 실수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방해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니느웨를 구언 하시려는 하나님의 으도를 방해하려 했던 요나처럼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도 여적 각성 없이 엉거주춤한 자리에서 생명 없는 기계처럼 습성 따라 소 명의 자리를 메꾸는 사람은 없습니까

둘째, 이 덜 깬 소명자는 자기 감정에 따라 분풀이로 하나님의 일을 그르 칠 위험이 있습니다. "이 니느웨 놈들아 지난날 우리를 괴롭힌 벌로 너희들 이 사십일 뒤에는 망할 것이다."이것이 요나의 감정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감정과 한풀이로 할 위험성이 있습 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중한 영혼들을 잃어버립니다. 덜 깬 소명자는 영혼을 죽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덜 깬 소명자에게 하나님의 이 시간에도 애타게 타 이르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많으려고 하느냐"(사1:5)고 말씀하 십니다 요나에게 제2의 매를 때리지 않고 다만 박넝쿨의 실물교훈을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가슴 메어집니다.

 우리는 깨어야 할 때 서둘러 깨어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1절에 말씀하 시기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우 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움이라" 하였고, 마태복음 26장 41절에 서 우리 주님이 "깨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몸소 말씀하셨지 않습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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