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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과 염소 (시 112:1-10, 마 25:31-46)

첨부 1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다. 옛날전도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지어 나 몰래 한 일까지도
사람이 한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는 심판에 붙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전도서 12:14)

인생무상을 이야기한 전도서 기자의 경우에도 인간만사는 하느님의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반드시 심판받게 마련입니다"(히브리 9:27)하느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는 너무나 엄청나게 다르다. 이것은 성서의 교훈이기도 하고 인간의 삶의 경험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세 단계로 구분하여 하느님의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리라"

첫번 예수는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베들레헴의한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목수의 아들로 소리없이, 조용하게 찾아오셨다.
그러나 두번째 예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거느리고 오신다.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 히브리 시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예언하였다.
"하느님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삼키는 불길을 앞세우고
돌개바람 거느리고 오신다.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려고"(시편 50:1-)

복음을 전하다가 관권에 의해 밧모 섬에 강제 유폐되었던 사도 요한이 본 환상도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크고 흰 옥좌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또 많은 책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계시록 20:12)인간의 모든 삶은 책에 기록된다. 이것을 역사라 한다. 인간은 반드시 그 책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증언이다. 건전한 사회는 역사의 심판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 있어야 건설된다.

(2)
"모든 민족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우리들은 우리사회의 혼란, 모순에 대해 걱정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부정은 극대화되고 폭력은 난폭해지고 범죄는 극악해지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한시도 안심하고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왜 그럴까 선

악의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옳고 그른 것의 한계가 혼미해졌기 때문이다.
힘만 있으면 살아남고 약하면 온갖 죄와 허물을 뒤집어 쓰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교훈에 의하면 하느님 앞에서는 양과 염소는 반드시 다른 곳에갈라 놓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석명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린도후 5:10)

1978년 8월에 있었던 일이다. 남쪽지방의 한씨라는 이름을 가진 경찰서장이 있었다. 그해 따라 온 나라가 가뭄에 시달리던 때였다. 그런데 이경찰서장은 자기 직위를 악용 소방차로 자기 논에 물을 대어 사회적 물의를일으켰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다.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니라 정신착란을일으킨 자기 아들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이것을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같은 해 4월에 있었던 일이다. 남쪽 서해안 지방에 있는 굉장한 양조장에서 살인사건이 빚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한 여학생의 시체가 술통 속에 빠져 있었다. 수사 결과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양조장에 관계된 한 방계회사장의 아들이 살인범이었다. 그 양조장 주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하고 해명해야 할까우리 나라의 5월은 소란한 계절이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달이요,

5.18 광주양민 학살사건이 빚어진 달이다. 정치-사회적으로 긴장된 분위기속에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들 혁명과 학살 사건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이 나라 민주화를 사장시킨 정치적 변란으로 비춰지고 있다. 경제적 성취같은 것으로 합리화할 수 없다. 그때의 주역들은 한결 같이 역사의 심판을받아 비명으로 사라졌거나 역사의 현장에서 치욕스러운 존재로 사라져 갔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이것은 예수를 죽인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기도 하고 예수로 하여금 그리스도임을증거한 하느님의 사건이기도 하다. 헤롯과 가야바 그리고 빌라도는 오늘도역사의 반동으로, 악의 상징으로 심판받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이 말해지는 그때까지 계속 심판받게 될 것이다.

(3)
"그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여라"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였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였기에 임금님이 준비한 나라의 주인이 된단 말인가 이에 임금님은 분명히 말씀해주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갈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언제 우리가 임금님을 대접했으며 돌보아 준일이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서로 묻기도 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일에는 매우 곤혹스러워 한다. 더욱이그 이웃이 굶주리고 헐벗고 옥에 갇혀 있다 하였을 때에는, 보잘 것 없는존재일 때에는 여러가지 구실로 사랑하기를 더디하거나, 아예 외면해 버린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을 위해서 오시는 인자(인자-그리스도)는 높은 사람, 부한 사람, 유명한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일을 기준으로심판하지 않는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아무런 보답도 할 수 없는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곧 임금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판단한다.

나라가 바로 되려면 통치자의 윤리와 역사의식이 바로 예수께서 가르친 "임금님"에 준해야 한다. 영향력있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국정을 의논하고 민심수습을 하는 한 나라는 늘 시끄럽고 물고 뜯는 비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보통사람 대통령은 보통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대통령의 이웃은 보통 사람들이어야 민심의 소재를 바르게 파악하고 사회의 비리척결도,민주화도, 사회안정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유물론자(T. 홉스)들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 이리"라고 여긴다. 자본주의자(A. 스미스)들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 장사꾼"으로 여긴다. 이리들은끊임없이 공격하고 잔인하게 싸워서 이겨야 살아 남는다. 유물주의자들은적자생존의 법칙대로 강자만이 살아남는 삶을 살아간다. 장사꾼, 얼마나 우리네 살림을 풍요하게 해 주는가 그러나 그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팔아넘긴다. 자기에게 유익하다면 페놀도 방출하고 식수도 오염시키고 과일에도 농약을 뿌린다. 그런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조용할 리가 없다. 안전할 리가 없다.

성서는 "사람은 사람에 대해 이웃"이라 증언한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사랑받는 까닭은 바로 여기 있다. 사마리아 사람이 있는 곳엔 죽어가는 사람의 구원이 있다. 강도가 출몰하는 여리고 길목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있음으로써 그 길목에서는 빼앗는 자 보다 주는 사람이 복이 있고 믿을만하다는 역사의 진리가 인류의 경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 여리고 길목의 주인이라는 역사의 진리가 인류의경전으로 전승되고 있다.

명지대학생 "강경대"군의 영전에 조의를 표하며 그의 죽음이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난다"(요한 5:29)는 예수의 진리를 성취하게 되는 날을 기다리며-아 멘-
발행일:910428
분 류:설교
평신도의 거듭나기-전국 평신부 총무협의회 강연-자료원:동대문감리교회 장기천감독

감리교회의 평신도운동이 "거듭나기운동"으로 전개된다. 그리스도인은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를 요청하기 때문이다.이 힘은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자기를 아는 것과 하느님나라의 차원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1)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하다. 모든 것은 자기인식에서부터 풀리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한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서 네가 누구인가를 알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는 성서적 인간은 아니었으나 인간을 하느님 앞에서 찾았다는 뜻에서 성서와 동시대인이라 할 수 있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예수와유대인 사이에는 여러가지 점에서 의견충돌이 있었다. 예수의 설교 중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자유케 하리라"(요한 8:31-32)는 귀절이 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비위를거스렸다.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있어 타인의 노예로 취급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예수의 견해는 달랐다. "죄를 범하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다"(요한8:34-)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간음 중 잡힌 여인을 심판하려던 무리들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 8:7)는 예수의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돌을 버리고 그 현장을 떠나갔다. 어른, 젊은이 할 것 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피해 버렸다. 성서는 인간의 역사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이해한 책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죄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첫번 단계는 "양심의 가책"이다. 양심은 꺼져가는 심지나 상한 갈대같을지라도 아직도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힘이다.

"사람들이 훗날에 거짓된 영들의 말과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버릴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교설은 거짓말장이들의 위선에서 오는 것이고 이런 자들의 양심에는 사탄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디모데전 4:1-2)
양심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관련된다.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양심의 악을 깨닫고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히브리 10:21)속죄는 사람의 양심의 악을 깨끗게 하는 하느님의 역사이다. 양심의악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

양심은 하느님의 심판과 상관관계에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의 비밀을 심판 하시는 그날에 그들의 양심이 증인이 되고 그들의 이성이 서로 고발도 하고 변호도할 것입니다"(로마 2:15)
하느님은 인간의 양심을 기준으로 인간과 그 역사를 심판하신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사도들의 설교와 그에 마음이 찔린 사람들의 회개를 통해이루어졌다. 회개란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한 양심의 참회를 의미한다. 거듭나기란 양심의 회복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도 온전해지지않으며, 사탄의 미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죄사함을 받을 수 없으며, 하

느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도 없게 된다.

(2)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5)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 나라의 구현에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주기도의 정신이요 예수 복음의 내용이다."때가 찼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1:15)

하느님 나라의 실체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으로설명하지 않으셨다. 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도리어 사도 바울이 하느님 나라의 실체에 관해 언급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로마 14:17-18)
하느님의 나라는 정의의 나라요 평화의 나라이다. 그리고 슬픔과 절망의 나라가 아니라 기쁨과 희망의 나라이다. 결코 종교적 의식이나 물질적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세인들의 인정을 받는 길은 장엄하고 엄격한 종교적 의식이나 물질적 풍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평화를 도모하고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사는 데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운동은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도우심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의 성격과 방향을하느님 나라의 구현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가치관의 전환이있어야 한다. 성령은 결단코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게 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동물이 되는 것도 반대한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며 그로써 삶의 기쁨을 찾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 백성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 5:10)하느님 나라와 정의는상관관계에 있다. 하느님 나라 없는 정의는 혁명의 구실이 되기 쉽고, 정의 없는 하느님 나라는 초자연주의가 되기 쉽다. 정의가 있는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뜻이 실현된 나라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있는 정의만이 자비와선을 겸비할 수 있다.

"내가 놋쇠 대신 금을 들여 오고, 쇠 대신 은을 들여 오리라. 재목 대신 놋쇠를 들여 오고, 돌 대신 쇠를 들여 오리라. 평화가 너를 다스리게 하고 정의가 너를 거느리게 하리라-너는 너의 성벽을 구원이라 이름지어 부르고너의 성문을 찬양이라 이름지어 부르리라" (이사야 60:17-18)정의와 평화가 있는 곳에 구원의 노래가 있다. 삶의 기쁨이 있다. 이것이바벧론에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의 희망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실체이다.

(3)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차원에서 설교했다. 그것도 이 땅 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전제하였다. 한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이 사실은 밝혀지고 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율법사의 관심은 영원한 생명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율법의본질에 대해 물었다. 그는 배운대로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

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누가 10:25-)

예수께서는 율법사에게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고 처방을 내려 주셨다.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생명과 상관된 나라이다. 영원한생명을 누리려면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한다. 사랑의 실천을 결단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삭개오와의 대화에서이와 동일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삭개오는 즉각 다음과 같은 자기 정리를 결단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을 갚아 주겠습니다"(누가 19:8-)
부의 사회적 환원의 모형이다. 그리고 사회적 불의의 청산, 배상에 대한 모형이기도 하다. 이에 예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려온 것이다"고 용서와 구원을 약속했다.

제자들의 관심은 "하느님 나라에서 큰 자가 누구인가"라는데 있었다.
이 문제로 인하여 제자들 사이에서 시기와 분쟁이 일기도 했다. 사람들은언제 어디서나 지위와 명예로 말미암아 미움과 싸움을 일삼는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였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4-)예수는 이를 뒷받침하는 뜻에서 임종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스스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다(요한 13:4-)"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예수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왔다. 그 가운데서도 자식들의장래를 위해 찾아 온 사람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의축복을 사모해서였다.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마땅치 않았다. 될수 있는대로제지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 부당성을 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가 10:14-15)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를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예수는 그들에게서 자기겸비와 순진함을 발견했다. 니체의 "죠아라스트라"는 어린아이에게서 "얼마든지야"를 발견했다. 그 결과는 반신적 무신론과 나치스를태동시켰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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