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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08: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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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절 말씀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 52-53절에서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선지자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분을 내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면서 5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브라함이 주님의 때를 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눅 16:22-31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천국에서 이 땅 위를 보고 있을 것이며 주님의 때를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뜻. (2) 창 12:3에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한 메시야가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난다는 약속을 보고 기뻐한다는 뜻. (3) 창 15:8-21에 아브라함은 메시야를 통한 이 민족의 미래의 환상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뜻. 이 모든 말씀을 성경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아직 생존시 이스라엘의 역사와 메시야의 재림에 대해서 환상을 보았던 것인데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예수의 날을 보았다고 말씀하실 때는 예수 자신이 바로 아브라함이 보았던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환상 가운데 본 것은 바로 예수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로써 수천년 전 아브라함이 예수의 때를 보고 기뻐하셨다는 말은 기이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정상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재림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이미 보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메시야라고는 믿지 않았기에 57절 말씀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오십이라고 했겠습니까 오십 세라고 하는 것은 예수 당시 모든 직분으로부터 은퇴하는 나이였습니다(민 4:3). 이렇듯 은퇴할 나이도 못된 젊은이가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니 참으로 미친 사람이나 하는 소리라는 비웃음이었습니다. 또 생각해 볼 때 예수의 나이 삼십 세 청년으로, 삼십되는 청년이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냐 하지 않고 오십이라 한 것을 생각하면 예수의 초상화처럼 오십쯤 되게 보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예수는 58절을 통해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가 아니고 있느니라고 하신 점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는 무시간적 존재이시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이 세상에 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우주에는 오직 한 분 무시간적인 분이 존재하고 계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며, 언제나 나는 영원히 스스로 있다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분이 오직 한 분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무시간적인 영원이 인간의 시간 속에 돌입해 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신앙 (1) 아브라함 시대의 종교 세계의 모든 일신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중심하여 발전하여 왔습니다. 마호메트교는 물론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한 가지로 천지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실 종교사에서 볼 때 고대종교의 거의가 브라만(힌두교신)교라든가 아즈테크(인디언 종교)교라든가 고대 팔레스라인의 다곤 아스다르신이라든가의 신앙, 인신제물 제사 제도에서 동물을 인신 대신 희생제물로 하여 번제로 드려도 만족한 제사가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도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인가 아브라함은 관념적 사람이 아니라 성경대로 역사적 인물입니다. 또한 그 는 무명 소국의 사람이 아니라 당시 온 천하를 지배하던 일대 제국의 도 시 갈대아 우르의 사람입니다. 알프레드 예레미야의 말에 의하면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뜻을 만민의 아버지라 하였으나 원래 그 뜻은 존경받는 제사장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 제사장으로 지내다 일찍이 그 마음속에 계시의 광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보다 더 순수한 신앙을 파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방신 제사장으로 몰두했던 신앙이 도리어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된 동기라고 보아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방 제사장직에서 그를 불러 고국과 모든 친척을 떠나 아직 보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의 자리에서 진정한 종교생활에 들어간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일이 종교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거기에는 정치상 관계도 없지는 아니합니다. 그 당시 바벨론 정세는 극히 난국에 처하여 유프라데스강 유역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창 14:1에 보인 아므라벨이 바로 하므라비왕 즉위 7년으로 우르 시민을 도살한 연대입니다. 이런 사적 기사를 보아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일에 피난의 의미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신앙상의 이유에서 발생한 결과라 함이 가할 것입니다. 창 11:31에서 처음 아브라함의 이주지가 하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란은 다메섹과 바벨론 사이에 있던 중요한 상업의 중심지였고, 니느웨와의 통상지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년간 여기에서 살았고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공명하는 자들을 다수히 얻었으니 곧 유대 해석가들의 운위하는 “그들이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이라”한 그것입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같은 신앙을 가진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소와 양떼를 몰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넌 듯합니다. 아브라함이 온 가족과 짐승의 떼를 이끌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도강하였습니다. 이후부터 아브라함은 히브리(도강자, 순례자)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히브리라는 이름을 얻은 과정, 부모 친척과 고향을 등지고 미지의 땅을 향하여 이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신앙이 뿌리박혔던 가나안 땅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의 선지자로서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발길을 내어디딘 성지가 바로 에발산과 그리심산 중간에 있는 세겜이었습니다. 세겜은 가나안 사람에게 점령된 땅으로 이방 종교가 예배하는 성지이니(창 28:16, 신 12:3, 삼상 7:16, 렘 7:12)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그곳에 정착할 수 없어 세겜을 떠나 순수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세겜의 동방 1마일 반 되는 장소에 제단을 쌓았으니 이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한 그것입니다 (창 12:6-7). 아브라함이 세겜을 떠나 제단을 쌓은 이 행동은 이천년 지난 후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분리하여 이방인의 교회를 조직한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후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떠나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고, 이 벧엘은 야곱이(창 28:11) 밧단 아람으로 가는 길에 쉬어간 곳이며, 이곳에 다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우상을 세운 이의 성지가 된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남하하여 애굽에 갔다가 다시 벧엘에 돌아와 하나님을 섬겼고, 다시 장막을 옮겨 헤브론 상수리나무 곁에 거주하면서 거기서 하 나님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브엘세바로 남하하여 여기에 서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을 불러 하나님의 시온성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로 이 땅에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세웠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마침내 브엘세바 이 제단이 반드시 하늘에서 내려올 시온성과 자 손들에게 주시마 하신 약속의 땅이 될 것과 약속하신 메시야가 나타나실 것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이 본 주의 날 과연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그리스도의 날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런 광경을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자기의 수난의 애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삭으로서도 그 청년 시기에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버이된 아브라함으로서 이를 감행함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일 주 예수의 당하신 그 수난이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라면 하 물며 이를 행하시는, 또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낯을 돌리실 때에 보 신 하나님의 고통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 인간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 즉 자기를 극복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애모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세상에 건설되는 천성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온성 천성은 주의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실로 아브라함이 본 그날은 진행되어 가고 있고, 새벽별의 혜성은 공간에서 진동하고 급진하는 여명은 새벽 창공을 명랑케 하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브라함이 본 주의 날을 가리켜서 계 22:20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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