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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마음, 새 사람 (겔 36: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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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에는 두 가지 상태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즉,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이 세상에 산재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몇 사람을 예로 든다면 우리나라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전 인물 중에 흥부와 놀부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대립된 얘기가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얘기입니다. 좋은 마음 가진 자는 축복을 받으나 나쁜 마음을 가진 자는 멸망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습니다. 모든 자연을 아름답고 조화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 자유의지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피조물 중에 사람만이 죄를 지었습니다. 처음 죄는 단순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고자 한 욕심이 있습니다. 약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욕심으로 인하여 죄는 점점 커지고 범람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큰 죄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죄된 마음을 가지고 평안히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내 마음속에 두고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속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버리고 새 마음을 가지기 전에는 평안이나 행복이나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리 새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안 됩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지 못합니다. 권세나 돈이나 명예, 결혼, 출세, 성공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교만하고 남을 깔보는 마음 그리고 자만과 승리감 지배감 묘한 쾌감을 주기는 하나 새 마음을 주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새 마음을 줄 수 있는 이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그 분만이 우리에게 행복도 줄 수 있고 새 마음을 줄 수도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좋기는 했으나 때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나쁜 마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아담이 배반했고 바벨탑을 쌓으면서 노아의 자손들이 배반했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서 배반했고 아합왕이나 므낫세나 르호보암이 배반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단련시키려고 지상의 법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당장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북으로 갈라지고 왕들이 부패하고 주변의 강대국들이 쳐 들어오고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이 망하여 앗수리아나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서 내용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마음을 주는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에게 새 마음을 주어 새 삶을 살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새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가 쓴 25시란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세상 에 와서 심판을 하려해도 사람이 있어야 할 터인데 이젠 땅에 사람이 없어 졌으니 사람이 없는 곳에 무엇 때문에 예수가 오시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늘의 사회가 인간성을 다 상실해 버린 한 동물과 같은 존재들의 움직임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그 가치가 평가 되 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계가 인간을 보는 두 개의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 는 유물론적 무신론인 공산주의 인간관입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의 인간관입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물질적인 면에서 평가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그 심령의 변화를 가져올 때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정한 변화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런던의 하이드 파이크에서 공산주의 한사람이 자나가는 걸인을 보고 “공산주의는 저 사람에게 새 옷을 입혀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기독교인이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라는 것은 정치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새 인 간 창조로만이 새 인간 역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대로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어 너희 육신에게는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했습니다. 새 영, 새 마음만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엡 4:22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롬 12:2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시 51:10에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성전에 들어왔다 하여서 거기에 은혜가 옵니까 많은 교인이 모였다고 해서 모두 천사가 되는 것입니까 모두 인간들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에 새 영을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1. 옛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옛 사람이란 타락한 인간을 말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기 싫어하는 자입니다. 곧 불의,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요, 썩어져 가는 구습 을 좇는 자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 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2. 새 사람을 생각하여 봅시다 새 마음을 가진 새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 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갈 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생명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롬 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 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이란 그 마음 중심에 주의 영이 거하는 자입니다. 겔 36:26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니 주의 영이 거하는 자들이요”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즉 새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새 마음은 굳은 마음을 없애 줍니다. 굳은 마음은 돌 같은 마음이라 했습니다. 돌 같은 마음을 없애주고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줍니다. 일치한 마음을 가지며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는 마음이며 넓은 마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청결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새 마음을 가진 교인이 모인 교회는 고집부리는 자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든지 부드러운 마음이 지배해야 합니다.

3. 새 마음을 가진 자의 생활 새 마음을 가진 자는 여호와의 법을 잘 지킵니다. 넓은 마음을 갖습니다. 겸손한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입니다. (1) 모든 삶의 목적이 하나님 위합니다. 술, 담배를 끊었다든지, 부정한 습관을 청산했다든지, 그런 변화는 새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변화는 세상 사람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목적 에 따라서 생의 의미와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세상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따 라 삽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 살 지 않습니다. 위하여 사는 대상이 달라져야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초를 끊음이 집사 된 체면 때문에 끊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끊었다는 것은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적이던 자가 이제는 그리스도가 목적이 된 자로 완전히 소속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목적과 주인과 중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2)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판단 기준이 달라집니다. 목적이 바꾸어지면 가치관도 자연히 변하기 마련입니다. 옛날에는 신령한 은혜를 세상적인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오늘 장사가 잘 될 모양이구나‥‥‥ 우리 아이가 성 적이 좋아질 모양이구나‥‥‥ 기도가 술술 나오는 것 보니까 금년에 운수 가 좋을 모양이구나‥‥‥ 이런 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미신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보면서 신령한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육체대로 보이는 것 세상적인 것에 기준하여 판단하였으나 이 후로는 보이지 않은 것, 신령한 것,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인 것에 기준하여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집을 쳐다보면서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보람있게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3장에서 전에 좋아하던 것들이 이제는 분토처럼 배설물 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란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은 한 인간은 행복도 없습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수억의 고급 주택, 자가용에 호의호식 세상 부귀영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불행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음에서 행복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3) 마음속에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고 여전히 세상 정욕적인 일에 매력을 느끼며 세속 적인 권세를 부러워하고 있다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불의한 재물을 저주스럽게 알고 죄된 부귀와 권세를 치욕적인 점으로 느끼며, 동시에 진실한 가난한 길을 부러워하고 의인의 고난을 영광된 것으로 알며,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수난의 길을 가장 큰 행복의 길로 아는 그러한 가치 판단이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잠 15:13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왜 근심이 있습니까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새 마음, 새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변화입니다. 세상적인 것, 정욕적인 것은 낡은 것이고 하나님께 대한 것만이 진정한 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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