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저를 나의 동무로 알라 (몬 01:15-17)

첨부 1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몬 1:15-17). 여기 본문에서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했습니다. 여기서 당시 로마 시대의 종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의 노예는 주로 전쟁의 포로들로서 부모가 노예이면 자식도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집안이 가난하여 돈에 팔려서 노예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인구의 4/5가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부자는 한 사람이 노예를 만여 명이나 거느린 지주도 있었으니 그 사람은 마치 일국의 왕과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를 재산 목록에 올리고 유산으로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도 하였습니다. 노예의 가격은 건장하고 튼튼한 남자가 보통 30세겔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소 한 마리의 가격이었습니다. 일체의 집안일을 노예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무식한 노예는 들이나 산에서 잡일을 하고, 좀 유식한 노예는 가정에서 일을 하며 관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헬라 문화는 노예 문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노예들이 건축물을 다 짓고 나면 그 주인이 노예들의 손가락을 다 자르거나 생매장을 하여 그보다 더 좋은 건축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노예의 결혼을 금지시켰습니다. 다만 노예의 종자를 얻기 위해서 주인이 힘센 노예와 튼튼한 여자 노예를 결합시킨 후 애를 낳으면 그 애를 주인의 물건으로 재산 목록에 올립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같이 살게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노예들은 소나 돼지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노예들은 평생 동안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이 허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들이 남녀 애정관계를 가지면 노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노예들은 죽도록 일만 하다가 죽으면 주인이 기르던 사자와 같은 맹수의 밥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노예들이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엄한 법을 제정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런 법 중에는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처형을 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달리는 자는 패잔병이나 노예가 반역한 경우였습니다. 또는 원형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맹수의 밥이 되게 합니다. 또는 의학용 실습자료로 해부하거나 실험하는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처벌 외에도 개인적으로 반항하는 노예나 도망간 노예를 죽이기도 하였으며, 또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노예의 이마에 불로 달궈 도장을 찍어놓기도 합니다. 만일 노예들이 반항하여 자유인을 한명 죽이면 노예들을 400명이나 생매장하여 죽였으니 얼마나 끔찍하고 하찮은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노예들이 많다보니 가난한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고, 자식을 팔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노예로 팔고 맙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시대 때 공창에 딸자식을 파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모든 일들을 노예가 다하니 자유인들은 유흥가에서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그 당시는 전쟁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포로들이 날마다 증가하여 더욱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도덕적인 타락도 많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타락한 로마를 향하여, 노예 제도와 타락한 사회 제도에 대하여 도전을 하였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노예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대우하여 함께 예배를 보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많은 노예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를 원하였고, 교회는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들로 인하여 기독교인의 수는 증가하 였고, 로마 당국은 그 세력이 무서워 기독교를 미워하고 박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누구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워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박해로 인하여 더 맡은 노예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이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유나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고, 또 주어 기쁨이 넘치는 것이니, 초대 교회는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소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15절에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낼 결심을 한 후에 생각할 때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하여 로마에 와서 바울과 같은 감옥에 갇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다시 빌레몬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이것은 새로운 계약을 맺게 하 는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로는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가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주인과 노예라는 육신적 사이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도 관계를 가지게 된 것 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바울은 오네시모를 구하려고 노력 하였던 것입니다. 17절에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동무란 같은 길을 걸어가며,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서로 허물이 없는 부부와 같은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빌레몬을 향하여 나와 당신은 같은 뜻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울러 오네시모에게도 빌레몬이 자기에게 대하여 준 사랑으로 대하여 주기를 간절히 부탁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은 빌레몬은 바울의 깊은 사랑과 형제애에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그의 간청을 기쁜 마음으로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도 이런 사랑을 받고 바울에게 더욱 감사를 하였을 것이며, 빌레몬에게는 더욱 충성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하여 이와 같이 간절히 부탁할 때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아들의 간구를 하 나님께서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바울이 보잘것없는 노예를 위하여 애타는 심정으로 빌레몬에게 사랑을 호소한 것 같이 주님은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간절히 도고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사랑을 깨달아 더욱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