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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하는 엘리에셀 (창 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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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는 일선에서 역사한 인류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등이며, 신약의 베드로, 바울, 요한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물들 배후에는 그들을 보필한 인물이 또한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와 공로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이와 같이 배호에서 역사한 인물입니다. 또 성서에는 위대한 기도의 전례가 여러 번 나타나 있습니다. 가령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의 사죄를 빌며 주이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한 모세의 기도(출 32:31-32), 포로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다니엘의 기도 (단 9장 ), 돌아온 백성의 범죄를 위해 빈 에라스의 기도( 스9장) 등을 들 수 있고, 예레미야 애가도 전편적으로 애가요, 또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대제사장이 기도라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기도( 요 17장 )를 위시하여 오순절의 사도들의 기도( 행 4:23-31 ), 바울의 기도( 엡 3:14-31 ) 등이며, 요한계시록도 전체적으로 웅대한 계시오, 또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들은 혹은 백성들의 사죄를 위해, 혹은 민족의 회복을 위해, 혹은 범죄한 백성의 회개와 재건국을 위해, 신약의 경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신비로운 진리 계시를 위한 웅대하고도 역사적인 기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가 생각하려는 기도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늙은 종이 주인의 자부를 택하기 위해 한 사소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오히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더 가깝고 더 절신한 교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의 기도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믿음으로 기도하고 출발했습니다.

창 24장은 그림과 같습니다. 아마 첫째 그림은 엘리에설이 주인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맡은 사명을 위해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그림일것입니다. 그 그림의 이름은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믿음이란 위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더불어 아브라함이 그의 종을 믿는 인간적인 믿음이 깊이 나타나 있으며 더구나 후자가 더욱 현저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엘리에셀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긴 데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부의 선택권을 전적으로 맡긴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새로 들오온 자부에게 아들 이삭의 행복은 물론 이 가문의 미래가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우선 낙타 10필에 실린 재물을 엘리에셀에게 맡겼습니다. 고대 중동의 풍속은 신부를 사는 법이고 신부의 조건을 딸라 그 값의 고가가 결정되었습니다. 같은 풍습은 지금도 아프리카에 남아 있다고 합니니다만 낙타 10필에 실린 보물들은 아브라함의 소유 중에서도 정수적인 것이며 최상의 자부를 구하기 위한 값진 물건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재물을 엘리에셀에게 맡겼습니다. 과연 이 늙은 종이 엘리에셀이라면 앞서 말씀도린 데로 만일 이삭이 나지 않았더라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삭과 이스마엘에 이어 세 번째로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삭은 그의 적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아들의 적수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었습니다. 엘리에셀의 마음 먹기에 따랄 이삭을 불행하게 할 자부를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태도에는 그런 의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안심하고 맡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인의 신뢰에 대한 엘리에셀은 “ 만일 여자가 가를 따라오지 않으면 어찌하리이까 ” 하며 맹세하기를 주저했습니다. 그의 성실한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신앙자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 불리웁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에는 위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더불어 사람에 대한 믿음이 겸비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헬라어로 믿음은 피스토스라 하여 신실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신실이라고 합니다. 신앙인을 엡 1:1에 “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 ” 라 했습니다. 여기 두 늙은이가 하늘을 향해 맹세하는 그림에는 믿음이 넘쳐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다같이 하나님을 믿었고 동시에 서로 믿고, 서로 신뢰하던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기도는 이와 같이 구비된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바른 출발이었던 것입니다.

2. 깊은 기도였습니다.

먼 여행에 지친 늙은 엘리에설이 메소포타미아 하란의 우물가에 앉아 평에 역시 먼 여행을 한 낙타들을 꿇여 앉혀 놓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모습은 한 장의 그림 장면과도 같습니다. 암스델담의 국립박물관에 메즈의 “ 기도하는 노파 ” 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가난한 식탁 위에 빵 몇 조각을 두고 늙은 여인이 합장하여 홀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문인이 이 그림을 가리켜 “ 깊은 기도 ” 라고 하였던 것처럼 엘리에셀의 기도는 깊은 기도였습니다. 엘리에셀의 기도를 깊은 기도라고 하는 것은 온 마음과 몸을 다하여 기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과거와 미래가 전적으로 여기에 집중된 기도였습니다. 그는 막중한 사명을 띄고 염려하면서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또 앞으로 다시 먼 길을 걸어 주인에게 돌아가 어떻게 보고할 것인가를 생가하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부를 바로 택하면 과거의 수고도 헛되지 않고 미래의 복명도 기쁘게 할 수 있는 기로에 선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그는 오직 기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징조로 물을 길려고 나오는 처녀에게 “ 물 좀 달라 ” 고 요구하고, 그의 대답이 “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 하면 그가 이삭의 아내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 기도는 언듯 듣기에는 무의미하게 들린 수 있지만 기도하는 자의 세심한 의도가 내표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엘리에셀은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했습니다. (1) 첫째, 그 “ 구하는 이상으로 응하는 ” 신부를 구했습니다. 이런 경우 “ 물 좀 달라 ” 는 엘리에셀의 요구에 응하는 방법은 세 가지 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 둘째는 그의 요구대로 들어주는 것, 셋째 는 그의 요구 이상으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좋지 않은 처녀입니 다. 둘째는 보통 처녀라 하겠습니다. 셋째는 보통 이상의 좋은 처녀라 하 겠습니다. (2) 둘째, 그는 근면한 신부를 구했습니다. 낙타는 물을 한 말 마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낙타 열 마리가 마실 물을 더구나 우물은 대체로 깊은 데 약한 처녀로는 물 긷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리브가는 열심히 물을 길렀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근면서을 시험한 것입니다. (3) 셋째, 사람 뿐 아니라 짐승까지 돌볼 줄 아는 신부를 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에는 노비도 많고 짐승도 만았습니다. 이 큰 집의 주부로서는 사람을 돌보는 동시에 짐승 떼도 돌볼 줄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에셀의 기도는 무의미한 기도는 아니였습니다. 깊은 뜻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엘리에셀의 기도는 일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3. 기도의 결과는 감사였습니다.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낙타에 싣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그림의 한 장면입니다. 엘리에셀은 드디어 사명을 완수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우물가에서 자신의 기도가 단번에 적중되었을 때 벌써 고개를 숙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27절). 리브가의 집에 가서 사정을 진술할 때 하나님께서 “ 바른 길 ” 로 인도하신 것을 진술했습니다. 이제 그는 가장 훌륭한 신부를 얻어 감사에 넘쳐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갈 때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는 거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정력적으로나 조금의 낭비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부를 직통적으로 찾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는 많이 하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가령 우리가 병이 나서 기도함으로 병이 낳을 때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를 잊어버린 자도 있습니다. 엘리에셀의 감사는 그가 곧장 귀로에 오른 데서 표시되었습니다. 신부를 결정한 바로 다음 날 엘리에셀은 주인께 돌아가려고 합니다. 신부의 부모는 섭섭하여 며칠을 더 모물도록 권면했으나 그는 기어코 일어나 돌아갔습니다. 만일 며칠 더 머물었더라면 마음 놓고 놀 수도 있었지만, 엘리에셀은 일어서서 돌아갔으니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는 주인이 염려할 것을 생각하여 자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께 돌아온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기도는 믿음에서 출발했고 감사하는 행동으로 끝난 것입니다. 기도와 믿음, 기도와 행동, 기도와 감사가 겸비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능력과 신비성을 실생활에서 체험하여야겠습니다. 약 4:23에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살려고 잘못 구함이라 ” 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에 힘쓰며 동시에 바른 기도를 하도록 유의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처럼 충성된 자세로 기도를 하여 응답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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