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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빛 (롬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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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죄인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빚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가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빚은 사람이 지어서는 안 될 흉악한 죄는 아닐런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갚아야 할 의무를 제대로 갚지 못한다고 할 때 그것은 곧 그를 죄의식 속으로 끌고 갑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를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외우기까지 합니다. 빚이 빚어내는 죄악이 수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회의 현실임을 감안한다면 빚은 어느 정도 죄와 상통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빚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현금 거래에서 지게 되는 부채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그것도 역시 빚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바울은 롬 13:7에서 그리스도인이 집권자에게 지니고 있는 빚, 즉 국가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만이 아니라 정치에 순응하고 군주에게 복종할 의무도 역시 빚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비유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가진 종은 반드시 주인의 돈을 떼어먹었기 때문에 그가 죄인으로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그는 주인에게 복종해서 그의 주인의 명령대로 하여 사업을 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아니하고 그 돈을 땅 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도로 내놓은 데서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누구에게나 빚을 져서는 안 되고 오직 사랑의 빚만을 지라고 했을 때에 사랑의 빚이란 곧 의무를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빚을 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고 갚아야 할 모든 빚, 모든 의무를 다 감당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솔선해서 빚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하고 모든 의무도 다 감당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욕은 교회에 돌아가고 그리스도에게 돌아갑니다. 우리가 질 수밖에 없는 빚, 그리고 벗을 수 없는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빚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을 쳐다 볼 때 그 대답이 나습니다. 롬 5:8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묻기를 내형제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리이까 일곱번 용서하리이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칠십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달란트 빚진 종의 얘기가 있습니다. 율법의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였나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일서 4:9-11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도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빚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본문에서 이 빚 갚는 것을 소극적으로와 적극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요 적극적으로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거의 십계명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며 비극을 초래하는 일입니까 자신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이 존중해야 할 것 중 남의 아내의 정조를 존중하는 일입니다. 내 육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남의 아내의 정조를 유린했을 때, 또 남의 남편을 빼앗을 때, 그것이 어떤 큰 비극을 빼앗긴 남편 또는 아내에게 가져다주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미혼자이든 부녀자이든 그 비극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육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미혼녀의 정조를 범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절망에 빠지게 되느냐 말입니다, 자살하는 비극도 이 때문입니다. 재물을 탐내거나 도적질하거나 강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기 가족의 삶과 삶을 위하여 남이 잘 때 자지 못하고 남이 먹을 때 먹지 못하고 남이 쓸 때 쓰지 못하고 저축해서 생활의 토대를 쌓아온 것을 빼앗아간다면 곧 그에게서 생활을 빼앗아 가는 것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의 가족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남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빚은 이렇게 소극적으로 남의 것을 침해하지 않고 존중하는데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 같이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는 이쪽저쪽을 다 사랑하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여 남을 버리든지 남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 못합니다. 한 여자가 두 남자를 사랑 못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반씩 갈라서 이 여자도 저 여자도 혹 이 남자도 저 남자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혹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에게로 혹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로 사랑을 옮길 수는 있어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제일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 어느 것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첫째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이웃, 세 째는 없음을 밝힌 것입니다. 곧 이웃 사랑은 자기를 거부해 버린 사랑이므로 그것은 곧 희생적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나를 희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희생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새 계명도 이런 자기를 희생하면서 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왜 자식을 길러 보지 않고서는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까 제 자식을 위해 희생적 사랑을 해볼 때 부모의 사랑을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생적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랑의 빚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졌고 또 갚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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