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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여 시온을 기억하옵소서 (시 7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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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 74편은 “마스길-교훈을 주기 위한 시”라는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 시는 환란의 날에 지어진 것으로써 교훈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환란에 처해 있든지 믿음과 열렬한 기도로써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며 의무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슬픔의 호소(1-11절) 이 시는 포로 중에 있는 시인이 고국의 도성 예루살렘과 성전이 훼파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시온산 예루살렘의 성소를 기억하면서 노래한 시입니다. 원수의 말발굽에 산산히 짓밟힌 조국의 도성과 귀하게 아끼고 거룩하게 받들던 성전이 이교도인 군대들에게 가차없이 약탈되는 참상의 비보를 들을 때, 실로 이 애국 시인의 심정이 어떠하였으며 신앙을 생명으로 한 경건한 유대의 종교가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애절 하였겠는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 74편 속에는 “나”가 없고 “우리” 뿐입니다. 개인이 없고 민족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의 처참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영구히 버리시나이까”라며 베벨론의 승리를 저주하기 전에 하나님이 왜 자기를 버리시는가 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적군을 막아낼 자신들의 무력함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왜 당신이 우리를 버리셨느냐”고 하나님의 구원만을 기다린 우리를 왜 저 버리십니까 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나라 정치와 종교와 사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종교적 음행과 도덕적 음행을 감행하기 때문에 그 백성에 대한 벌로 그 화려한 수도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그렇게 외쳤지만 이 시인은 그런 예언자의 경고를 여기에서 회상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왜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던 이 양떼들 위에 진노의 불길을 보내셨느냐”고 항변했습니다. 이 시인은 원수들이 이 예루살렘 성에 대하여 오만하게 행하는 것은 결코 볼 수 없다고 합니다. 3-4절에 “영원한 파멸을 만난 시온 성이 되었고, 원수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고 있음이라”라고 했으며, 저들은 승리의 깃발을 곳곳에 꽃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울분을 터뜨리게 하며, 도끼로 나무를 찍는 사람처럼 저 대적들은 도끼와 철퇴를 가지고 성전에 있는 모든 장식들을 쳐부수고, 그 성전 안에 있는 지정소를 침범하여 더럽히고, 그리고 성전을 불살라 버렸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4-5절). 우리는 이런 역사상 비극들이 가끔 되풀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이 민족에게 짓밟히어 산산히 부서지고 불태워지며 능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지구의 거의 절반이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조국의 깃발을 떼어 버리고 원수의 깃발로 대치시켰으며 성소는 모조리 불살라 버리었고 더러는 이교도의 신앙으로 더럽혀졌고 한 사람의 선지자도 없어져 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소망을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자리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참상을 볼 때 이 시인에게는 이 백성이 하나님에게까지 버리운 백성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온의 자랑은 성전입니다. 시 48:1-2에 “온 세계에 자랑거리인 성소”이며, 시 48:13-14에 “하나님이 죽을 때까지 인도하실 하나님이 계신 성소”가 이제 원수들에게 짓밟힌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말한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 더럽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나라의 주권이 상실되고, 자기 민족이 이 민족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함에 대해 분개심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야웨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힘을 자신의 인격이나 소유가 약탈 당한 것같이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가장 절망적인 위치에 떨어졌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권능까지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10-11절). 하나님이 지금 팔짱을 끼고 있으나 만일 그 팔을 빼기만 하시면 아직도 원수를 진멸하고 자기들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탄원은 자기의 절망을 철저히 의식하고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구원만을 철저히 바라고자 하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2. 거룩한 능력에 대한 인정(12-17절) 이 시인은 애국자도 아니요, 애족한 사람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야웨 하나님이 없는 민족, 그 하나님과 관계를 떠난 나라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시 33:12에 “이 야웨를 하나님으로 삼는 나라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은 이러한 신앙과 비극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긍휼을 애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다시 회고하면서 산비둘기 같은 자기 백성을 맹수 같은 대적의 손에 넘겨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3. 열렬한 간구(18-23절) 18절에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여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능욕을 받는다는 것을 들으면 참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는 그들의 비방에 응답하려 하지 아니합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해 주세요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고 아직도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우매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가 세상에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간구하기를 20절에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건지실 때 그것은 그의 언약을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레 26:42에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신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한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매사에 은혜로 취급하십니다. 지금은 어려운 일이 있을지 모르나 나중에 가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소망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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