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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고전 15: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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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다른 모든 종교는 그들의 교주의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석가나 마호메트나 공자도 모두 그들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 속에는 그들의 유골이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무덤은 빈 무덤이요 열린 무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상에 수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과 핍박과 역경을 당했지만 영원한 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바라보면서 살아 죽음까지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자신의 부활과 영생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기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는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하였을 뿐이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소망 중에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애써 아껴오던 것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허무를 느낍니다. 연인이 자기 곁을 떠날 때, 건강이 무너질 때, 사업이 실패했을 때, 백발과 죽음이 성큼 다가올 때, 허무를 느끼며 절망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힘써 노력하여 성공했을 때에 오는 허무감이 있고 끝내 성공치 못한 데서 오는 허무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의 콜기오스는 말하기를 “어떤 것이든지 존재는 없다. 존재가 있다고 해도 알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18세기 소련의 작가 트르겐예가 「아버지와 아들」이란 책에서 허무주의를 사용했습니다.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 보니 허무주의는 19세기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 때 일어난 회의론적 철학이라고 합니다. 허무주의는 모든 전통적 가치와 신념은 근거가 없고 모든 존재는 결국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어떠한 객관적 진리의 기초를 부인합니다. 니체는 지금까지의 가치 해석의 구절에서 신은 죽었다고 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졌습니다. 현대의 허무주의는 긍정을 찾지 못하는 부정이요 불안, 회의와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정신입니다. 현대의 허무주의는 보통 세 가지 뜻을 가진 것으로 알려집니다. 1) 모든 도덕과 신앙의 부인 2) 모든 실제적 지식의 부인 3) 모든 현존 제도와 권력의 부인입니다. 우리 국민은 일제시대와 6·25를 통해 허무주의를 느꼈습니다. 여태껏 의지하고 믿어오던 가치관, 진리가 일시에 헛된 것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아끼던 재산을 잃고 사회 질서는 무너지고 피난가야 했고 산천은 전화로 황폐해 갔습니다. 자식은 잃고 가족은 헤어졌으며 젊은이들은 어쨌든 군복을 입어야 하고 총을 메고 일선에서 동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전통과 가치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6·25를 통해 허무주의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세계 1차, 2차 대전으로 서양인들도 다 허무주의를 느꼈던 것입니다. 실존 철학이 나오고 세대 상실의 문학이 나오고 일본의 원자탄 세례로 일본 정신은 다간 데 없고 허무주의를 느꼈습니다. 일본은 7할이 허무주의 자요, 3할이 유물론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실 허무주의자는 전쟁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허무주의인 것입니다. 사실 현대 허무주의는 어떤 사상 이상으로 인간의 삶 자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역사상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려 무척 애쓴 흔적이 있습니다. 칼막스는 사회를 개혁하고 공산주의로 극복해 보려 했습니다. 훼밍웨이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는가 등의 문학을 통해 극복해 보려 했습니다. 히피들은 째즈 음악 등을 통해 허무를 극복하려고 온 힘을 다 기울였으나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1. 오직 예수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노벨상 수상 작가 까위는「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시지프스 신의 형벌을 받아 지옥에서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겨우 산정까지 굴려 올렸는가 하면 큰 바위는 산밑으로 굴려 내려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 일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인간생활도 이처럼 무의미한 일을 매일 반복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허무의 굴레를 극복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술과 색으로 허무주의를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근본문제는 그래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회의와 허무는 죄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허무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 허무를 극복하려면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2. 오직 기쁨으로 허무주의를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이란 짜증스럽게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이며 고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람에서 오는 기쁨을 가질 때는 권태를 막을 수 있고 짜증도, 허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1) 참 기쁨은 시간의 흐름을 단축시킵니다. 즐겁고 기쁜 시간은 아쉽도록 빨리 지나버리고 무의미한 시간은 미치도록 지루합니다. (2) 참 기쁨은 생활을 윤택케 하고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고 이웃까지도 즐겁게 합니다. 웃는 장소에 가보면 절로 웃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3) 참 기쁨은 천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천국생활은 권태와 허무가 극복된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구미 사람들은 기쁨을 Joy라 합니다. 이것은 먼저 Jesus를 앞세우고 다음은 Other (다른 사람)을, 그리고 마지막에 Yourself (당신 자신)을 세울 때 인생의 참 기쁨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세 글자의 앞자를 따서 합하여진 말입니다.

3. 오직 소망으로 허무를 극복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궁극적인 목적이 없습니다. 죽음으로써 인생의 종막을 내린다고 생각하여 허무와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영원이 있습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행한대로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흔들리지 말고 힘써 일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 소망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안 믿는자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여러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오직 기쁨으로, 오직 소망으로, 이 허무주의적인 인생의 삶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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