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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벨의 교훈 (창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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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국제회의나 유학이나 국제인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절실히 느끼는 일은 언어의 장벽이 없었으면 더 친밀해지고 더 발전하는 세계가 되었으리라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어공부, 제 2외국어를 잘 익힌다 해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자주 일어납니다. 이러한 인간의 언어는 바벨탑에서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벨탑에서 혼란을 일으킨 언어가 사도행전에 이르러서는 성령의 역사로 다 알아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말은 사상의 표현입니다. 또 감정과 의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에 천량 빚을 갚는다”라는 우리 속담은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은 나뭇잎과 같습니다. 잎이 무성하면 과일이 적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 가운데 “소문난 잔치집에 먹을 것이 없다”라는 것이 있는데 이 속담이 바로 이런 점을 풍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순절의 말의 일치와 바벨의 언어 혼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시는 중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바벨과 오순절은 혼란과 일치의 대조었습니다

 바벨의 뜻은 혼란입니다. 웅대한 건축공사를 진행하던 인류는 언어의 혼란으로 그 공사를 중지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가령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벽돌을 쌓던 사람이 아래 있는 인부에게 벽돌을 가져달라고 하는데 인부는 물을 가져왔습니다. 벽돌공은 왜 물을 가져 오느냐고 야단칩니다. 아래 인부는 언제 벽돌 가져 오라 했느냐고 대꾸를 합니다. 결국 시비가 벌어지로 일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같은 한국 말을 하는 데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갑의 말을 을이 이해하지 못하고, 을의 말이 갑에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곧 사상이 통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사상이 통하면 한마디만 해도 열 가지를 알게 되고, 또 묵묵히 있어도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같이 하지를 못합니다. “유태인 셋이 모이면 마음이 넷이 된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맞지 않는 사회에는 언제나 혼란이 오기 마련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는 혼돈이라 했습니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며, 바다도 아니고, 육지도 아닌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위의 물과 아래 물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또 육지와 바다를 만드신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혼돈의 상태에 있을것입니다. 첫째 신륜(神倫)과 인륜,(人倫)을 구별 못하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바벨에 대조되는 오순절 역사는 일치합니다. 바벨이 한 언어에서 많은 언어로 나누어진대 대하여 오순절 역사는 많은 언어가 서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역사는 삼인사심(三人四心)이 아니라 120명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오순절 역사는 단일이 아니라 이자(異者)의 일치였습니다. 그것은 동질자의 단일에 비할 수 없이 풍부하고 다양적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음악에서 단음의 제창보다 코오라스의 화음을 들을 때, 또는 큰 오케스츄라의 연주를 들을 때 다양성의 일치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성은 모든 피조물을 다르게 지었다는 것입니다. 큰 나무에 많은 잎들은 모두 다르다고 합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65억의 사람들도 다 다릅니다. 얼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격과 취미도 모두 다릅니다. 이와 같이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일치하고 조화할 때 일치의 미가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소인은 같으면서도 불화하고 군자는 화합하나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화합과 일치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2. 흩어진 역사와 돌아 오는 역사

 바벨에서 노아의 자손들,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창 10장에는 그들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은 남방 아프리카로, 셈은 동방 지역으로, 그리고 야벳은 북방 유럽 지방으로 각각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유태인(디아스포라)은 흩어진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크게 두번 흩어진 백성들입니다. 구약시대에 바벨론 포로에서 흩어졌고, 신약시대에 와서 주후 70년의 예루살램 함락으로 고국을 잃고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국토 없는 백성으로 가는 곳마다 그들은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구박받으며 문제를 만드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으로 유태인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심리는 바벨처럼 흩어지는 듯합니다. 이와 같이 돌아갈 마음의 고향을 잃고 사는 현대인은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바벨에서 사방으로 흩어진 인류처럼 현대인은 하나님을 등지고 끝없이 흩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사회가 참된 조화를 잃고 끝없는 분규와 분쟁을 반복하는 것도 돌아갈 궁극적 고향인 하나님을 잃은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에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이 일에 성도들이 앞장 서야 하겠습니다.

 3. 인간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의 대조입니다

 바벨은 인간의 기술과 역사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역사는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인간들은 창 11:4에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높은 탑을 쌓고 그들의 능력을 과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위대한 것입니다. 높은 산과 같은 마천루를 쌓아 올리고 치밀한 콤퓨터를 만들어 우주 공간을 달려 달 세계를 거닐면서 인간 만세를 부르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하면서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고 한 말이 어떤 의미에서 실현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벨탑의 공사는 중지되고 인간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쌓은 바벨탑은 결국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고대 바벨론의 폐허, 또 멤피스트나 폼페이의 폐허 등 고대 도시들이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바벨의 종국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역사는 인간을 무시하거나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성화시키고 인간을 하나 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바벨과 오순절의 역사, 우리들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열려 있습니다. 혼란과 일치, 흩어짐과 돌아옴, 그리고 인력을 의지함과 성령을 대망함의 두 가지 갈래길에 우리는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나라의 구원, 세계의 평화, 인간의 문명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부터는 새로운 구조적인 악이 생길 뿐입니다. 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진보를 가져 오는가, 혹은 퇴보를 가져 오는가 하는 것은 일반 사회 과학자에게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문명이 아니라 복음에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벨탑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이 함께 오는 오순절의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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