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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번째 유월절 (민 0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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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되기 전 날 저녁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번 유월절을 기념하였습니다(출 12장). 이 구원의 만찬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제 거의 1년 동안 시내산에 진을 치고 있던 백성들은 여기서 이 절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들에게 유월절을 지켜 유월절을 끊임없이 계속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역사의 성격을 형성하였고, 유대인과 그리스도도 교인 사이에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 유월절의 의미가 주의 만찬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준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철저히 강요되었습니다.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으로 새롭게 된 공동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정월달의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하여 2월 14일로 유월절 추가 행사일을 정하였습니다. 14절은 또 다시 이스라엘과 의 유월절을 지킬 적임 대상자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타국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출 12:48). 계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반드시 동일 혈족에 국한하지는 않습니다. 유월절에는 두 개의 아름다운 근본 진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구속과 하나님의 백성의 동일성입니다. 이 진리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제거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에 여러 모양의 실패도 있고 불성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구속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완전한 통일성이라는 이들 진리들은 언제나 위력과 가치를 지니고 남아 있습니다. 환경이 이 규례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나 여행도 이 규례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일 우리가 오직 그 연약함을 알고 자백만 한다면 아무리 연약한 상태에 있는 우리라도 맞아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지극히 고귀하고도 위안이 되는 진리를 악용하여 죄나 부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은혜로 인해 정월 대신에 2월을 허락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기의 율례와 규례에 다소라도 소홀해서는 안 되게 되었습니다. “무교병과 쓴나물”은 언제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물 중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또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나 거룩의 표준을 조금이라도 낮출 수는 없었습니다. 연약이나 실패나 환경의 위력에 의해 사람이 혹 시간에 뒤지기는 하지만 결코 표준을 낮추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2월에 지키는 유월절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 은 2월 절기가 정월 절기보다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행사의 중요성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는 동일합니다. 어느 경우이든 순서상 차이점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 동일합니다. 정월 유월절 준수에 관할 언급이 있는 곳에서는 우리는 단지 “너희는 그것을 지키되 그 모든 율례와 그 모든 규례대로 지킬지어다” 라는 말만을 읽어 보지만, 2월의 유월절 준수에 관한 언급이 있을 때는 그 율례와 규례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보다 자세한 진술이 있다는 것입니다. 11-12절에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기지 말 것이며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라고 했습니다. 어린 양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비유합니다(고전 5:7). 무교병은 죄악을 제거한 생활을 가리키고, “쓴나물”은 그들이 그 때에 당한 애굽에서의 고난을 비유합니다. 유월절의 먹음은 기독 신자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는 것처럼 죄를 떠날 것을 비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 절기를 지킨 뒤 급히 애굽을 떠났듯이 기독 신자는 죄를 피하여 천성으로 향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지킨 의식적인 제도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표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잘 밝혀줍니다. 히 9:9에 “구약의 의식적 제도들이 신약의 비유라”고 했으며, 히 9:10에 “구약의 제도가 신약으로 대치될 때까지 사용된 “육체의 예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예법이라는 말은 속죄적 희생의 진수는 실상 내부적인 것인데, 이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언하시고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13절에 “그러나 사람이 정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니” 라고 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증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지키기를 원치 않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되기를 거부하는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짐이 될 것은 필연적 결론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보현을 기념하는 성찬을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도 역시 하나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로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환영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이스라엘에게는 유월절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들이 구속함을 받은 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견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주의 성만찬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구속과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고 있는 모든 활동 가운데서 주의 성만찬 이상으로 자기의 마음에 감격스럽고도 엄숙하게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는데 더 인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궤도 없는 광야를 여행하는 남녀노소의 무리를 봅니다. 여기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침판이나 인간의 인도 같은 것도 없이 메마른 광야, 넓은 사막을 통과하는 무리를 봅니다. 여기에는 여행하는 길에 대한 사전 지식도 전혀 없거니와 음식 및 기타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탁하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무력한 순례의 대군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굉장한 생각입니까? 그들은 내일을 위한 계획도 없습니다. 장막을 칠 때에는 언제 행군해야 할지도 모르며 또 행진할 때에는 언제 또는 어디서 머물러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들의 생활이란 하루하루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인도하심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진행은 여호와의 수레의 바퀴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외국인에게 대한 선처가 있습니다(14절).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고픈 외국인들은 반드시 개종을 하여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출 12:48-49).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자들에게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이 허용 규정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케 되리라는 것을 암시해 준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러한 율법이 있었듯이 메시야의 시대에서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자들과 외국인들을 위한 한 복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즉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을 경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응답되느니라”고 했습니다(행 10: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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