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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대 금령 (신 2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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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혼잡한 이치를 싫어하십니다. 9절에 “네 포도원에 두 가지 씨를 뿌리지 말지니”한 것은 혼잡한 교훈이요, 10절에 “너는 소나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이라 했고, 7절에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한 것은 혼잡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혼잡한 이치를 미워하사 혼잡한 이치를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이 분명합니다. 1. 하나님께서 교훈을 혼잡케 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9절에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는 말씀은 순수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레 19:19에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내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두 재료로 조직한 옷을 입지 말지니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하는 이 말은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섞어 뿌린 겨로 거둔 것은 하나도 거두어 들이지 못한다고 번역되었습니다. 먹을 수 없는 결실이 있든지 순수성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각기 종류가 있는데 교종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라 그 종류의 것은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억지로 한다면 그는 실패하는 것으로 포도원이라도 거둘 것이 없게 된다는 말씀을 착념하게 될 것인데, 고후 2:17에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이런 교훈도 있습니다. 고후 6:15-16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은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후 6:14에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는 이 말씀과 본 절이 잘 통합니다. 속된 일과 타협하면 무엇이 되는 듯 하나 그것은 위배 되는 일이며 그것은 성역에서는 더러운 일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역사를 섞어하지 말라 하십니다 10절에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소는 깨끗한 짐승이요 나귀는 더러운 짐승이니 소는 역사하는 짐승입니다. 그 씨를 뿌리는 밭은 세상이니 소와 나귀길 그 밭에 같이 있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겨리하지 말라 한 것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밭에는 하나님의 씨만 심을 뿐 아니라 그 연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소로만 써야 합니다. 사람이 특별히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경영하든지, 혼인 중매하는 일, 봉사하는 일등 무슨 일을 하든지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하지 말라하신 것입니다. 철학자 스펜서는 그의 친구와 의분을 끊는 편지를 한 것이 한 통 남아 있는데 내용인즉 “우리가 전 일에 서로 얘기한 그 목적은 잠간이 아니요 제일 길고 제일 크게 상관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는 것과 우리의 행하는 것과 우리의 바라는 것과 우리의 두려워하는 것과 우리의 기뻐하는 것과 우리의 슬퍼하는 것이 세상과 우리에게 크게 상관되는 문제니라. 이런 중대한 일을 경하게 여기지 못할 것이다. 또는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은 이상과 이념이 서로 다른 즉 이와 같이 생각이 다른 것 같으면 친한 친구가 될 수 없다. 나는 믿는 사람이라 믿는 뜻을 따라 살아야 할 터인데 형과 같이 지혜있게 이야기함으로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보면 믿음이 상할까하여 섭섭하지마는 이제 선의를 끊고 이후로는 다시 만나지도 아니할 것이요, 만나더라도 친구 모양으로 만날 수 없다”하고 친구되는 것을 거절하였습다. 이와 같이 모든 신자는 세상 사람과 사귀므로 믿는 마음을 상실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소와 나귀를 겨리하며 밭갈지 말라 하였습니다. 소는 제물이요, 나귀는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동상이몽이라는 말도 있듯이 마음이 같지 않은데 멍에를 같이 맨다면 힘만 더 들고 일을 잘되지 않으며 순수하게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주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3. 행위를 섞지 말라 하였습니다 11절에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양털만의 옷이라도 못 입습니다. 이는 땀을 흘리게 하는 옷이요, 성역에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그 땀이 잘 흡수되는 의복을 입어야 합니다. 자연히 섞어 짠 옷도 베옷만 못할 것입니다. 이는 제사장에 한한 것일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위생적으로 땀이 잘 흡수되는 옷이라야 합니다. 옷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출 13:1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단순성은 가장 값진 것입니다. 예수님만 입을 것이요 다른 우상을 섞어 입을 수 없습니다. 벧전 2:2에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오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순수한 복음을 외치는 자는 그 얼마이며 순수한 복음을 들을 줄 아는 자는 또 얼마가 됩니까? 죄에 대한 교훈은 아랑곳없이 육의 만족으로 웅변을 좋아하고 야담을 좋아하며 얘기 듣는 재미를 앞세운다면 이는 설교를 잘 들을 수 없게 됩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순수성을 말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거룩하게 생활하는 것은 깨끗한 흰 베옷에 하나님의 실만 섞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일을 상관하는 것이 위험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언제나 그리스도의 순수함 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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