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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김(우는 자들) (삿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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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는 우리가 잘 아는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드보라, 입다, 삼손 그리고 그외 몇몇 사사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설이 출애굽에서 광야 40년 생활을 지내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여호수아를 앞세워서 여러가지 전투에 승리를 하고 가나안을 거의 점령했습니다만은 몇 곳 점령치 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사사가 나타나서 그들이 남겨둔 가나안족속들을 인하여 어떻게 화를 입을 것인가를 경고하면서 일종의 저주를 선포합니다. 3절에 “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 이라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제사를 드렸더라 ” 고 했습니다. 보김이라는 말은 “ 우는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기서 얼마나 울었으면 “ 우는 자들 ” 이라고 지명을 붙였을 정도이겠습니까? 사사기의 전 메세지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회개했다는데에 촛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을 외면한데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 하였는가에 촛점이 있습니다. 수 24:14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울고 유언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앞에 놓고 유언했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의 대답은 수 24:18에 “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니라 ”, 여호수아가 이르되 19절에 “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 하실 것이라 ” 고 했습니다. 이 세 마디를 잘 음미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얘기는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강권을 하다보면 끝에 가서는 화를 내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 화가 났다 ” 는 것만이 아니라 “ 얼마나 큰 집념을 가지고 권면하느냐 ” 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김에 너무나도 무성의하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화를 내면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그들에게 촉구합니다. “ 그러면 좋다 내 집만은 여호와를 섬기겠다 ” 고 말하면서 여기서 “ 마음대로 하라 ” 는 것은 결단코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면 안된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마침 여호수아의 진심에 감동을 했는지 “ 예 그러하겠습니다 ” 라고 합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감격하여 모든 백성과 더불어 울며 하나님 앞에 칭송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상당히 어리숙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만큼 하나님의 가장 큰 기적 속을 살아 왔으면서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민족은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알신을 섬기고 아세라신을 섬기는 신앙과 그저 비슷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기분이 나면 섬기고, 기분이 나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리는 이상한 종교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참신이시요, 하나님만이 신이십니다. 그를 외면하면 큰일납니다. 그 간절하심과 그 긴박성들 여호수아는 전달하고 싶어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쉽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수 24:20에 “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아주 대답을 잘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26절에 “ 이 모든 말씀을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도록 이 돌판이 증거가 되리라 ” 고 했습니다. 큰 돌을 기념비로 세워서 이 돌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계명을 지킬 것을 약속 삼았습니다. 모세를 일으키신 하나님, 여호수아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지금 이tm라엘의 동일한 하나님이시요, 군사요, 방패요, 승리를 약속하시는 분으로 편이 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전부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삿 1:19에 “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시므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 고 했고, 삿 1:21에 “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 고 했다. 삿 1:27에 “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이낙과 그 향리의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며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라 ”고 했고, 삿 1:30에 “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했다 ” 는 것입니다. 이제 사사기 2장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능력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의 바로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이끌어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창칼을 들고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10가지 재앙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내리심으로 바로가 손들고 내어 놓았습니다. 홍해를 어떻게 건넜습니까? 배를 타고 건넜습니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사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광야 40년동안에 씨뿌린 적이 없고 목축한 적이 없으나 발이 부르튼 적이 없고 음식이 모자란 적이 없고 목마른 적이 없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했습니다. 요단강을 가르고 마른 땅으로 건너왔고, 여리고 성을 다만 7번 돌아서 넘어 뜨렸습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2절에 “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그들의 단을 헐라고 하지 않았느냐 ” 고 했습니다. 이 땅 거민을 진멸하라는 말은 소위 종교적 차원이었습니다. “ 너희가 이땅 거민을 쫓아내지 아니한 것은 그들과 언약을 세우기 좋아했고 그들의 단을 헐고 싶지 않아서이다 ”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지적한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 더 좋게 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다. 어떻게 망했습니까? 이스라엘 전 역사의 99%에 해당하는 기간을 그들은 남의 나라의 종노릇 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사사기 이후가 증명하듯이 80년, 20년, 40년 계속적인 적치하속에 들어갑니다. 미디안, 블레셋, 아멜렉, 암몬, 모압 이외에도 앗수르 드디어 바벨론에 망해서 70년, 잠시 해방되었다가 로마에 다시 속국, 그랬다가 속국 정도가 아니라 갈갈히 흩어져서 2000년 동안을 유리 방황합니다. 말할 수 없이 괄시를 당한 것이 이 민족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느냐? ” 고 쉽게 얘기를 합니다만 결론을 알면 무엇이든지 쉽습니다. “ 컬럼버스와 달걀 ” 과 같이 뭐든지 알면 쉽습니다. 성경이 사사기의 내용을 기록한 것은 결론을 보이므로써 오늘 보김 사건의 수준에 와 있는 우리에게 동일한 결론에 가지 말라는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 편이 되면 되는데, 어리석게 고생을 했다고 쉽게 말하지 마십시요. 이 치욕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보김』은 울어버려서 당한 장소입니다. 회복될 수 있었던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선언하십니다. “ 너희가 남겨둔 것이 무엇이 되는가보자 내가 예언하노니 그것은 너희의 가사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다 ” 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것이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됩니까? 호 5:14-6:3에 “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곧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 고 했습니다.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인가, 인격적 차원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는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내 감격밖에 없습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도 기분이 좋고, 내가 기분이 나쁘면 하나님도 기분이 나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내 기분이 주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지적한 부분을 네가 고쳐야 합니다. 나에게 맞춰서 하나님이 고쳐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틀렸다는데 우리가 맞았다고 우길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것을 향하여 모아지고 있는가를 보십시요.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부분에 있어서 이런 견줌, 이런 비교, 이런 착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상당히 가볍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인맥을 통하고 돈으로 쓰고 다 해보다가 안되면 올림픽 복권처럼 한 번 걸어 보는 것, 이런 신앙은 위험한 것입니다. 내가 육신이 잘 되고, 편하고, 잘 먹고, 잘되고, 남부럽지 않을 때는 예수를 몰랐는데 육신이 파괴되고 사업이 망하고 의지할데 없을 때 예수라도 믿어 보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높은 분이시며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실 분이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가 저주하면 저주받게 되어 있고 그가 우리를 축복하면 축복받게 되 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경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 우리 죄값을 지불하라 하며 우리를 지옥 불속에서 이를 갈게 하시는 공의의 심판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저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케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성도의 신앙 수준입니다. 각자 신앙의 기분에 따라서 하나님을 소홀히 대접해도 된다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수 24:19에 “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집념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축복입니다. 우리의 자랑입니다. 동시에 긴장하실 수밖에 없는 엄청난 두려움을 수반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면 화를 내시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화를 내실 때 부디 귀를 열어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갖고 계시는 그 엄청난 사랑과 집념 앞에 항복하시는 축복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야 됩니다. “ 보김 ”, 이것은 울어버려서 하나님이 나를 향한 간섭을 제대로 지적받지 못하고,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여 고치지 못해서 망한 민족들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망했는가 하는 얘기가 사사기 전체에 걸쳐서나옵니다. 동일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성경은 오늘 우리 앞에 이 생생한 기록을 펼쳐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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