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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아만 장군의 단점과 장점 (왕하 0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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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은 문둥병을 고침받기 위해 당시 이스라엘에서 크게 역사하고 있던 선지자 엘리사에게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문 밖에서 있는 나아만에게 나가보지도 아니하고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요단강에 가서 네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깨끗하여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노하여 물러 나오면서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쳐줄 것으로 알았다고 하며 실망하여 돌아섰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종들은 나아만 장군 앞에 엎드려 간청하기를 병이 나을 수 있는 일이라면, 선지자가 당신을 향하여 더 큰 일을 명하였더라도 행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물며 씻어 깨끗하게 하라고 하심이야 못하겠나이까? 라고 하였고, 이에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내려가서 몸을 씻으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내용 속에서 주목되고 있는 것은 나아만이 내 생각에는‥‥‥ 운운하였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주님 앞에 나오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은혜의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무서운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내 생각이라는 것이며, 동시에 축복의 문을 여는 비결도 내 생각이라고 하는 아성을 무너뜨리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너희보다 높다고 하였습니다(사 55:8-9). 이제 우리는 본문 내용 속에서 나아만에게 문제된 생각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1. 나아만의 단점 (1) 나아만은 엘리사의 냉냉한 대우를 감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뜨거운 환영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냉냉한 환영도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인간에 대하여 늘 온화하신 태도로만 대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어디에 숨어 계신 듯하여 성도를 돌보아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 89:46에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아 여인이 찾아와서 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원할 때에 냉냉한 태도로 말씀하시기를 마 15:26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이런 냉냉한 말씀 같은 것도 감수해야 복을 받습니다. 그가 그렇게 냉냉하신 이유는 그 냉냉한 듯한 것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말하기를 욥 13:15에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2) 나아만은 복음의 평준성을 몰랐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에는 자기가 권세있는 자요, 누구에게나 높임받는 자였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도 역시 자기에게 특별 대우를 해 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수준에 놓고 똑같이 취급하고 있음을 나아만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합니다. 이것이 곧 복음의 평준성입니다. 이 복음의 평준성이란 모든 인간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의 생각은 교만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문둥병 환자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나아만 자신은 감히 아무 것도 요청할 수 없는 처지었으며, 오직 호의를 바라는 탄원자임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를 찾아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그의 생각에 저가 내게로 나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쳐줄까 하였도다고 하며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고 노여움을 폭발시키며 되돌아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 앞에서 온 세상 만민은 모두 다 평등하며, 더 높고 낮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3) 나아만은 복음의 단순성을 몰랐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에는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쳐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와 보지도 아니하고 요단 강물에 가서 일곱 번 그 몸을 씻으라고 하는 단순한 방법을 전한 것뿐 이었습니다. 이렇게 처방된 방법에 대하여 나아만은 역겨움을 느꼈으며 자기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라서 그의 마음에 흡족치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치유에 대한 방법을 거창하게 생각했고, 색다른 묘안을 연상하며 찾아갔는데 엘리사의 처방이 너무도 값싸고 평이하게 자기와 같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으로서는 쉽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요단 강물에 들어가서 씻는 정도의 방법 같은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대로 복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아만은 그 약속을 믿고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유형적인 형식주의에 빠질 위험을 피하여야 합니다. 복음의 역사는 굉장한 방법이나 화려한 형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단순한 순종의 생활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9:14).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복음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 경험으로 제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4) 나아만은 복음의 우월성(추월성)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에 “내가 요단 강물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몸을 씻는다고 문둥병이 나을 수가 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이 바로 문제인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인간의 수단 방법이나 어떠한 힘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오직 신앙에 대한 요청일 뿐입니다.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믿고 행하기만 하면 역사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우월성과 초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인하고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2. 나아만의 장점 그는 아랫 사람의 말도 명심하여 들으며 그대로 순종하는 장점을 지녔습니다. 13절을 보면 그의 종들이 말하기를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엘리사가 지시하였던 그대로 순종하여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그므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분노하였지만, 이제는 회개하였으므로 그런 것은 문제시 되지 않고 효과를 얻었습니다. 물론 그 순종이 다소 복잡한 단계를 거쳐서 나왔으므로 불완전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취급하실 때 그 심리와 행동의 과정에 혹시 잘못된 것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진실로 회개하고 순종하면 그것을 인정하여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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