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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앗수르 군대 파멸 (왕하 19: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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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적적 간섭에 의하여 앗수르 군인 18만 5천명이 죽임이 되었고, 산헤립 자신은 자기의 두 아등의 반역으로 죽임이 되었습니다(대하 32:21). 산헤립이 자기의 신을 섬기던 자리에서 그렇게 죽임이 된 사실은 그의 신이 그를 구원하지 못함이 입증되었고, 산헤립의 참람된 말은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1. 산헤립의 몰락 (1) 앗수르 군대는 완전히 패주하였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이 메시지를 보낸 다음날 밤에 저들은 곧 그 성읍 앞에 진을 치고 참호를 열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밤에 적군의 주력 부대가 그 장소에서 천사에 의해서 살육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들을 역습하고, 그들의 진영을 공격할만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칼과 창으로 그들을 살육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파멸의 천사를 보내셔 한밤중에 그들을 강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수병들은 그 천사를 볼 수도 저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엎어진 것은 “용사의 칼이나 어떤 평범한 인간의 칼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유월절날 밤 애굽의 처음 난 자들을 살해했던 그러한 천사의 칼에 의해서였습니다. 그 역병은 그들을 즉사케 하였던 것입니다. 살해된 숫자는 18만 5천명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앗수르 군이 모두 죽은 시체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거룩한 천사들의 힘과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인간들 중에서는 최대로 강한 자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연약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의 교만과 망령됨은 그의 군대의 파멸로 징벌됩니다. 이 모든 생명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시온의 안전을 위하여 희생된 것입니다. (2) 앗수르 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가 아주 교만스럽게 자랑했지만 자신을 대하기가 부끄럽게 되었고, 전쟁에 패하였고, 정복을 추구할 수도 없게 되었고, 자기의 병력도 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자신이 그러한 타격을 받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36절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 방식은 그의 마음이 혼란에 빠져 심란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두 아들의 손에 살해당한 것은 그 후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습니다. 아들이 자기들의 친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니 이 얼마나 극악한 무리들입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하나님의 거역한 자는 그 자식을 통해서 징벌받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당신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당신은 마땅히 예배되어야 할 분이심을 산헤립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상 섬기는 일을 계속 고집했습니다. 그는 값비싼 댓가를 치룬 증거를 보고도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으므로 그의 아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제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산헤립의 계승자는 그의 아들 에살하돈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처럼 정복지를 확장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정복지를 잘 활용할 생각을 가셨습니다. 앗수르의 식민들을 사마리아에 이주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에스라 4:2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을 그리로 데려온 자는 에살핫 돈이다”라고 말합니다. 2. 앗수르 군대 앞에 섰던 히스기야의 임전 태세 (1) 히스기야는 정신무장을 굳게 했습니다. 그는 국난을 극복하고 침공해 을 대적을 격멸하는 있어서 어떠한 군대나 무력보다 첫째로 정신무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더 말할 것 없이 강대국 앗수르의 무력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무력 침략에 대결하려면 적에 비하여 더 많은 병력과 현대 무기를 동원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계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히스기야 왕은 인간의 힘이나 무력에 의지하지 알고, 위협의 정보를 접한 즉시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인 이사야에게 사람을 급거 파송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국난, 즉 임전에 처한 하나님의 능력에 매달렸다고 하는 최고 최선의 정책이요, 가장 현명한 전략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여기에 기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위대한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 자신과 선지자 이사야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손을 움직여서 자기는 아무런 힘과 무기도 없이 단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앗수르 진지에 있는 18만 5천명의 적을 섬멸하였던 것입니다. (2) 임전 자세는 두려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임하여 취할 자세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 2:10에 “주님이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왕하 6:14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도단성에서 아람 군대에게 포위를 당하여 있을 때 그 사환이 공포와 실망에 사로잡혀 엘리사를 향하여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하며 떨고 있을 때 엘리사는 사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데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하니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병거와 불말이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했습니다. 이 결과 엘리사를 포위했던 군대는 하나님의 능력의 불가항력으로 제 갈 곳으로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때 능치 못함이 없으며,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억센 강적이 엄습해 오는 어떤 상황 속이나 어떤 곳에서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기도하며 그를 의지한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핍박이건, 천재지변이건, 전쟁이건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완전한 피난처를 찾아 구해야겠습니다. 피난처라면 안전한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깊은 산과 계곡도 아니요, 큰 바다 가운데 있는 무인도도 아닙니다.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는 바로 하나님의 곁입니다. 시 46:1-3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했고, 시 18:1-2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하고 안전한 피난처시니 그에게만 가면 안전하고 그와 함께 있으면 전쟁도 환란도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영원히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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