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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혼을 소생 시킵니다 (시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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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3편은 구약의 주기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선민의 목자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신약 성도들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 양들에게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 42:11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넘어진 양을 연상케 합니다. 넘어진 양은 매우 가련하고 불쌍합니다. 벌렁 나자빠진 채로 발로 허공을 치며 일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가 말은 못하지만 살려달라고 아우성칩니다. 이상한 것은 양은 넘어지면 혼자 일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말도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배에 허리띠로 묶어 매달아 서서 잠을 자게 합니다. 목자는 넘어져 있는 양을 일으켜 세울 뿐만 아니라 양을 잡아먹는 맹수들로부터 지켜줍니다. 경험 있는 목자들은 하루에 몇 번이고 양들의 수를 세고 혹시 양이 넘어지게 되면 지체하지 아니하고 붙들어 세웁니다. 목자는 하늘을 쳐다보고는 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천천히 기다란 나선형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을 볼 때는 걱정스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목자는 양들이 있는 곳에 가서 어떤 이상이 있나 확인하고 저들의 수를 세어보곤 합니다. 한 마리의 양이 넘어질 때 목자는 이 넘어진 양을 위하여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모릅니다. 본문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아름다운 사람과 건강한 사람을 세상에서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합니다. 미모의 여성, 건장한 남자라 할찌라도 그 마음이 죄로 부패한 영혼은 그 아름다움과 그 건강이 결코 자랑할 바가 못 됩니다. 우리는 하루 세끼의 밥을 먹고 계절 따라 옷을 잘 갈아 입습니다. 그런데 더럽혀진 영혼의 옷을 빨고 잃어버린 영적 생기를 되찾을 생각은 왜 못 합니까? 영혼의 목자는 우리의 시들어진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넘어진 우리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성경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영혼의 목자는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물에서 영혼을 소생시킨 다음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이 병들기 쉽고 심령이 넘어지기 쉬운 조건이 무엇입니까? 필립 캘러라는 분은 “목자가 본 시 23편”이란 책에서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1) 첫째 원인은 양들은 부드러운 장소를 찾으려는 의식이 있습니다. 눕기에 평안한 움푹 들어간 장소를 택하는 양들은 번번히 넘어집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생활에도 고생 없이 평안이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좀 힙이 들고 귀찮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자진해서 할 수 있는 빈곤과 궁핍의 훈련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심령이 튼튼하게 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환경이 여의치 못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뛰는 사람은 걷는 것이 쉽습니다. 걷는 사람은 서 있는 것이 더 쉽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앉는 것이 편합니다. 앉아 있는 사람은 눕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내려가는 것은 힘쓰지 않아도 쉽게 내려갑니다. 그러나 올라가려면 여간 애쓰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안한 곳만 찾아가면 결국 내 영혼은 넘어지고 맙니다. (2) 둘째 원인은 털이 너무 많이 자란 양이 넘어지기 쉽습니다. 양의 털이 너무 길게 자라면 진흙과 똥과 여러 가지 먼지로 무겁게 엉켜서 양이 그 몸을 움직이는데 힘이 들고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성경에서 털은 그리스도인의 자은 습관에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의 생활입니다. 세상 생활할 때의 욕구, 희망, 내 포부 이런 것이 세상과 접촉할 때 내 영혼을 무겁게 누루는 것이 많아 있음을 발견케 됩니다. 양털은 자신의 사랑과 개인적인 우선권을 의미합니다. 목자는 그런 긴 털을 다 깎아 줍니다. 지성소로 들어갈 때 대제사장들이 털옷을 입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3) 셋째 원인은 양이 너무 비대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비대한 양은 약하고 건강하지도 않습니다. 체중이 무거운 양 일수록 더 잘 넘어집니다. 그리고 느리고 둔합니다. 목자는 이런 양을 위해 엄격한 양의 사료 정량을 배급합니다. 목자의 소원은 비대하고 연약하고 무기력한 양이 아닌 튼튼하고 정량적이고 민첩한 양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되고 성공적인 안정감과 자신감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의 성공이 반드시 영적인 건강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서운 불운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강인성은 인내와 고생의 단련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세상적인 것으로 인하여 너무 살이 쪄 있는데 이것을 좀 빠지게 하기 위해서 좀 괴로와도 힘이 들어도 우리에게 훈련시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주님은 내 영혼을 소생케 하십니다. 요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주님과 대화함으로 중생에 대한 교훈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 시 자기는 주님 앞에 나와 방부제 몰약을 드림으로 자기 신앙을 고백하였고 훗날 감독이 되었다 합니다.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주님을 만남으로서 새사람이 되었고 주님께서 이로 인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구원이 이 가정에 이루어졌도다고 했습니다. 미 캔터기주 가난한 농가깁에 태어난 링컨이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남으로 위대한 사랑과 정의의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20대에 주님을 확실히 영접함으로 인간 역사의 영원한 불후의 걸작들을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헨델과 모짜르트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 오선지에 옳겨 놓은 멜로디들은 영원히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주고 있습니다. 키엘 케골의 마음속에서 예수님과 만났을 때 인간의 고뇌를 극복하는 위대한 철학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페스카로치는 사랑의 원천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목마른 존재들입니다. 마셔도 또 목마릅니다. 가져도 또 모자랍니다. 보아도 보아도 또 더 보고 싶어 합니다. 현재의 인간으로서는 충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과 만나지 못한 이유입니다. 주님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목자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서 우리들의 전 생애가 위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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