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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지자의 다급한 호소 (렘 2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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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 욥도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고 (욥 3장), 요나도 자기가 죽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욘 4:8).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서 죽기를 원하였습니다(왕상19:4). 예레미야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뻔 했다고 말한 것은 예레미야의 신앙이 잠 깐 동안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핍박이 심하고 비방하는 원수들이 너 무 많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신앙이 잠이 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옴은 어찌된 일입니까? 13절에서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그토록 즐겁게 말하던 자가 14절에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이라고 어떻게 분연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앞에 나온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록한 것이요, 여기에 나오는 말씀은 자기의 수치를 위해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같이 암흑의 시대에 홀로 고독하게 말씀을 대언하던 하나 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의 처절한 탄식 소리를 들 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탄식 소리는 그의 예언 사역이 그만큼 고통스러 웠음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탄식 가운데서도 자신의 사명을 다시금 인 식하려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선지자의 탄식

(1) 예레미야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14절에 "내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이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곤고한 욥이 그랬던 것 같이(욥3:1) 자기 생일을 불명예스 러운 날로 낙인을 찍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면 좋 을뻔 하였다는 그의 바램입니다. 예레미야가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그의 환경은 그는 20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고 불의로 인한 타락 상이 관영되는 시점에서 예언자로 시작하게 되었으나 온 백성으로부터 하 나님 말씀과 자신이 외면 당하는 어려움을 겪자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그리고 "복이 없었더면"이라고 탄식하며 하루 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축복 가운데 택한 자들을 보내셨고 값진 달란트를 맡기신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깊은 절망이 엄습한다 해도 성도는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의 뜻을 인내하므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2) 고통스런 현실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15-16절에서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 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 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아버지에게 생남 소식을 전한 사람을 저주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더 기뻤을 것입니다. 제사장 가계 출신이었으므로 그는 살면서 하나님의 제단에 봉사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탄생 소식을 기별한 자에게 대 해 아주 거침없이 그리고 지독하게 저주를 퍼붓습니다(16절).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소돔 고모라 성읍 같이 되었으면"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의 불행을 조금도 경감시키시거나 완화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출생의 소식을 전한 자도 그런 성읍 같이 되게 해 주셨으면 좋을뻔 했다고 그는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아침에는, 즉 일어나자 마자 포위한 대적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하여 놀라게 하고 낮에는 승리의 함성을 듣게 하였더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사람을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게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예레미야는 생각하였습니다.

(3) 예레미야는 자기가 태어난 현실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17절에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운명이 애굽에 있던 히브리 자녀들의 운명과 같지 않았다는데에 분노를 느낍니다. 그는 자기가 태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고 자기의 첫 호흡이 마지막 호흡으로 되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곧 질식사하지 않은 것을 노여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탄생을 알렸던 기별 자가 자기를 죽이는 하수인이 되었더라면 좋았을뻔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가 비참하게도 언제나 그를 복중에 품고 있어서 더 이상 소동을 피우지 않고 그 아기 집으로 그의 매장지가 되게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 욥은 태와 무덤간의 유사성과 공통점을 시사해 줍니다. 욥 1:21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지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의 사명보다 자신의 삶을 우선 생각하며 큰 비탄 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만을 생각한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고정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한한 힘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로를 세 상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잠시만의 위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분노와 흥분으로 인 하여 절제하기 힘든 순간을 만날지라도 우리 감정을 하나님의 다스리심 에 복종시키는 일이 시급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픈 심정을 싸매주시며 지극한 사랑으로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4) 인간의 한계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18절에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현세적 재난이 이 패역한 소원들을 합리화시켜 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상 숭배와 사치와 방종으로 일관하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는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선 예레미야는 담대하게 백성들을 경고하면서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지금까지와는 전연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귀한 직책에도 불구하고 "고생과 슬 픔" 그리고 "수욕"으로 인하여 그는 극심한 비애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 다. 우리는 여기서 선지자의 인간적 고통과 고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 명자도 한 인간이기에 이런 현실적 고통과 갈등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2. 본문이 주는 교훈

(1) 사명의 재확인에서 가능합니다. 예레미야는 조국의 현실과 운명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경고하는 것이 자 신의 삶에 있어서 최대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비록 감당하 기 힘든 짐이기에 잠시 탄식하였지만 이러한 탄식 가운데서도 사명을 바로 인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삶의 목적 또한 자명해 집니다. 성도는 불신자의 영적인 무지와 그 종말을, 그리고 이 사회의 죄악이 몰고 을 그 결국을 분명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핍박과 조롱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사명을 완수키 위해 계속 해서 패역한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메세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렘 20:7-9).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당하는 멸시와 수욕을 자신이 겪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과정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의 말씀으로 인하여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 씀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생명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이고, 이 생명을 다하기까지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전파해야 하 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특권이, 사명인 것입니다.

(3) 예레미야 생을 통해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1) 인생살이의 허무함과 삶에 수반되는 헛수고를 관찰할 수 있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있기에 이 괴로운 세상도 소망으로 바꾸어 살 수 있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2) 죄 많은 정욕의 우매성과 불합리성을 관찰합시다. 혈기와 정욕대로 산다면 얼마나 비인격적인 삶을 누리겠습니까?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자기를 낳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얼마나 야만스럽고 짐승적인 일입니까?(사45:10). 우리는 이런 일들을 귀감삼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무절제의 혈기와 정욕을 억제하고 악한 영이 말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뜨거울 때 혀에는 재갈을 먹여야 합니다. 3) 선한 사람도 약점을 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선한 자라고 해 봐야 고작 인간에 불과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심을 해야 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날마다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많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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