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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을 옮길만한 믿음 (마 17: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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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경우가 많고 자기의 재능, 기술, 힘, 수단방법을 다해도 실패함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입니다. 성경에 봐도 몇몇 실패의 사실이 나타나 있음을 봅니다. 신랑을 맞이하러 간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 했다가 신랑 맞이하는 성사에 실패하였고, 베드로는 수제자로 잘 지내다가 마지막에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실과 본문 말씀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이 없으므로 간질병 환자를 고치지 못해서 부끄러움을 당한 사실 등입니다. 1 . 실패의 내용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결말을 의논, 결정하고자 열두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시니 산 아래에 아홉 제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남루한 옷에 머리와 얼굴은 상처로 사람의 꼴이 아닌 한 소년을 앞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뒤따라 아홉 제자가 있는 산 아래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리들이 이르러 한 사람이 제자들 앞에 나서더니 “이 애는 내 아들로서 간질병으로 심히 고생하고 있사오니 고쳐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애원하였습니다. 이에 아홉 제자는 제각기 자기가 고치겠노라고 앞을 다투며 나서 보았지만 아무도 고쳐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써 아홉 제자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 실패의 원인

(1) 불평, 원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홉 제자들은 어찌하여 나를 빼놓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가더란 말인가? 하는 불평에서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세 제자에 대해서 시기를 하였던 것입니다. 아홉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부 다 데리고 가야할 일이었다면 어찌하여 세 제자만 데리고 갔겠습니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어찌 이적을 가져올 수 있는 믿음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2) 교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아홉 제자들은 불만으로 한참 열을 올리고 있을 즈음에 병자를 데리고 온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병을 고쳐줄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제각기 아홉 제자는 앞을 다투며 자기가 고치겠노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시 101:5에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약 4:6에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교만이 앞선 저들은 아무리 예수의 제자라고 자부 했어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3)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17절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책망했습니다. 믿음만이 기적이 가능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는 믿음의 선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 옮기운 에녹, 방주를 예비하여 여덟 식구 전부를 구원케 한 노아, 모험으로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 잉태치 못했던 사라의 잉태나 그 외 야곱, 요셉, 모세의 어머니 모두가 믿음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입니다. 막 9:23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과연 저들이 믿음이 있었으면 실패함이 없었을 것이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4)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막 9:28-29에 보면 제자들이 종용히 실패의 사실을 물으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이유를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매듭을 풀 수 있으며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기도는 모든 것의 허락이요 승리의 비결도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끊임없는 기도로 모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를 가까이 하시며 그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에서 허락의 복이 주어집니다.

(5)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서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셨더라면 앞에의 문제가 문제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인간들만의 모임에서는 인간성이 나타나서 거룩한 성벽이 빛을 못 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3. 실패의 결과 아홉 제자는 제각기 자기의 있는 힘을 다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간질 병자와 함께 서기관을 비롯해서 많은 무리가 아홉 제자에게 왔고 제자들이 하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의 흠을 책잡으려는 차에 얼마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비난과 조롱으로 아홉 제자는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한참 창피를 당하고 있을 쯤에 세 제자와 함께 예수님께서 도착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참으로 변화산 아래는 실패의 곳이요, 부끄러운 곳이요, 책망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4. 산을 옮길만한 믿음 오늘 본문의 중요한 말씀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다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을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면 이 성구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성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많은 오해를 안겨다 주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우리 교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뉴스 중 하나는 영등포에 일어난 다섯 식구의 음독사건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믿었습니다. 막 16:18에 “믿는 자에게는 뱀(독사)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한 기사를 오해하여 다섯 식구가 믿음으로 죽지 아니할 것이라 하여 독약을 마신 끝에 몰사하고 말았다는 사건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칫 그릇되면 그처럼 비참한 결과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에 대하여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오해하고 일종의 광신, 혹은 맹신 상태에 빠질 때 무서운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이적은 옳게 믿어야 합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어떤 불구소년이 있었습니다. 늘 비관했습니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았습니다. 부흥사의 안수로 나아보려고 부흥회와 부흥사들을 무던히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늘 실패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회개하지 못해서 그런 줄 알고 죄를 다 회개해도 안 나으니 고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기도가 잘못인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친구시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아 그의 일생은 변했습니다. 비관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뛰어 노는 것을 앉아 구경하였습니다. 친구들이 기뻐 뛰어노는 것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의 산을 정복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산을 옳기는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불가능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영의 문제가 해결될 때 육의 모든 환경이 해결되고 어려운 여건이라도 감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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