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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이 크도다 (막 0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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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 15장에만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거기에는 늘 시험이 따르고 배척과 반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유대인의 반대에 봉착한 주님은 갈릴리 지방을 떠보시고 이방인의 경내로 후퇴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유랑의 길에 오르시고 제자들의 교육에 주력하신 것입니다. 두로는 뵈니게의 항구로 보통 두로와 시돈이라고 말합니다. 왕상에 보면 솔로몬이 레바논의 백향목을 두로에서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돈은 아합왕 때 바알신을 도입하여 나라의 신으로 섬기게 한 이세벨의 고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방 땅에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가지고 들어간 것입니다. 25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간절한 요구를 지닌 여인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구주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밝혔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로보니게란 말은 이 여인이 살고 있는 지방을 가리킴인데 수리아 지방의 뵈니게란 곳입니다. 뵈니게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하여 강한 적의를 품고 살아왔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꿇어 엎드려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 말은 메시야에 대한 호칭입니다. 마 9:27에 보면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마 12:23에서는 주님께서 소경과 벙어리를 고쳤습니다.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다 놀라 말하기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메시야를 부를 때 다윗의 자손이란 말로 불렀습니다. 이 여인은 안타깝게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치 아니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침묵이 무엇을 뜻하셨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는 이방인의 병까지 고쳐주어야 하느냐고 주저했다고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그 여인의 믿음을 더 깊게 하기 위하여 시간을 주셨다고 추측합니다. 아마 양편의 추측이 다 맞을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그 여인의 믿음을 기르기 위해 결정적으로 만든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침묵이 인간의 믿음을 향상시킬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잘 기억하는 대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 아들이 방탕한 생활에서 돌아오기를 위하여 얼마나 애쓰며 기도했습니까? 십년을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어 낙심 중에 교구장인 암브르시오에게 찾아가 흐느껴 울며 호소했습니다. “신부님, 제 아들 어거스틴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버리시나봅니다. 제가 아무리 애타게 이렇게 오래 기도해도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아들 어거스틴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여전합니다. 아니 점점 더해가는 것 같습니다.”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습니다. 눈물로 호소하는 모니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암브르시오 신부는 “자매님!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를 가진 아들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위로하며 계속 기도할 것을 권면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했던 것도 있을 것입니다. 내 욕심으로 구한 것이었더면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하여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다. 계속 구해야 합니다. 본문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끝까지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잠잠하시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계속 졸라대니 제자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선생님, 이 여인이 뒤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어소 보내소서” 했습니다. 예수님은 신중한데 제자들은 단순히 귀찮으니 “어서 잘해서 보내 버리십시오”의 태도였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 보냄을 입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겔 34:6에 보면 “내 양의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지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 예수를 배척하는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양의 태도와 같습니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요 10:11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는 먼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종래 배척하므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롬 2장에 말씀한 대로 첫째는 유대인이고, 다음은 이방인에의 복음의 길이 확립된 것입니다. 이 경위를 제기하는데 본문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답이 없으시다가 제자들의 독촉에 대답한다는 것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할 때 보통 사람이면 다 물러서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처음에는 멀리서 소리만 질렀으나 이제는 가까이 와서 절하면서 애원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냉대도, 예수님의 무관심도 이 여인의 결심과 열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기도에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7:7에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구하는 이의 태도는 얻을 때까지 구할 것이요 찾는 이의 태도는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자는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릴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 나와 절하며 “나를 도우소서”라고 애원했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념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개는 언제나 불결, 비천, 비양심, 탐욕스러운 것을 표시합니다. 토한 것을 다시 핥아먹습니다. 헬라의 고대 시인 호머는 “수치를 모르는 남녀를 개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도 흔히 쓰이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조금도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실로 신앙과 겸손과 기지와 인내의 미덕이 조화된 신앙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오해도 할 수 있고 불평할 수도 있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개로서 자족했고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부스러기만 얻어먹어도 만족하다는 믿음을 가졌고 그러면서 결코 낙심하여 후퇴할 수 없는 인내를 갖추었습니다. 건전한 신앙에는 이런 미덕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야곱이 밤을 새우면서 씨름하여 얻은 힘을 이 여인도 얻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첫 청원은 침묵으로 대하였고, 둘째는 냉정한 개의 비유로 대하였고, 셋째는 격찬으로 대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마 14:3에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을 들었으나 이 이방 여인은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마 8:10에 보면 백부장의 믿음과 더불어 이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은 믿음의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은 주님께서 병을 고쳐줄 수 있음을 믿었고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겸손, 인내, 기지가 필요합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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