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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눅 07: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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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란 사람이 요단 강가에서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민족이 목마르게 갈망하는 새 세계를 준비하여 메시야의 오심을 외치면서 민족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러 일으켜 이스라엘의 신앙을 재부흥시켰던 사람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위대한 메시야의 날을 세례 요한이 소개해 준 것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왕을 책망한 일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넓고 험한 들판을 누비면서 야인으로 살던 그에게 감옥생활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새 시대가 다가왔음을 외치면서 그 새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계획된 이스라엘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고 마음은 점점 압박감을 느껴가고 가장 소중한 것을 유린당한 허탈한 느낌 속에서 혹시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절망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를 보낸 것입니다. 그는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면서 예수님에게 “오신다는 분이 당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초조한 물음이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당신이 정말 메시야라면 왜 빨리 행동하여 혁명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악과 부정으로 팽창해진 이 시대에 왜 잠잠히 그대로 있습니까? 나는 정의를 외치다가 투옥되지 않았습니까? 언제 혁명을 시작하겠습니까? 빨리 대답해 주십시오. 밝히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행동으로 보이십시오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세례 요한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새 시대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의 애타는 심정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실망 속에서 자신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하는 이 물음은 전 인류가 운명을 내놓고 던지는 심각한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대답할 말이 없다면 기독교는 생명이 없는 종교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내가 메시야가 아니면 누가 메시야라는 말이냐”고 대답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21절 말씀에 예수께서 거기서 질병과 고통과 귀신으로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맹인을 볼 수 있게 해주시고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바로 거기서,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현장에서 대답하신 것입니다.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외치던 메시야의 날의 구체적인 모습이 예수가 계신 현장에서 지금 실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시대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대답이었습니다. 새 세계의 시작은 단순한 신체적 불구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세계를 못 보는 정신적인 맹인, 삶의 자신과 용기를 잃은 인격적인 절뚝발이, 문둥병 같은 도덕적 파산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막혀버린 귀머거리, 죄로 죽은 불행한 인간, 이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삶을 시작하는 새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고통하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대답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동시에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메시야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옛날 어떤 무신론자 한 사람이 어떤 동방인에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하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오른편에 있던 어떤 동방인은 “어젯밤에 내 천막 밖에 무엇인가 걸어갔는데 그것이 낙타이겠습니까? 사람이겠습니까?” 하고 반문했습니다. 그 무신론자는 말없이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가서 그 걸어간 발자국을 보고서 바로 알아 맞추어 “낙타가 지나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동방인은 서산에 넘어가는 불그레한 해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어느 사람의 발자취이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서도 그의 걸어가신 발자취를 보아서 그것이 하나님의 발자취인지 뭇사람의 발자취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관 속에서 다시 살아나오게 하던 나인성의 발자취는 사람의 발자취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발자취이겠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묘실로부터 인봉한 돌문을 헤치고 끝없는 생명으로 다시 부활하신 발자취, 물이 변화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던 발자취,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발자취, 이런 발라취가 과연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언제나 우리들은 “나는 성도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성직자이다” 하는 자부심 때문에 안도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또 종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가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던 것과 똑같이 우리들은 “와서 보라”고 우리 생활을 보여 주며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요한에게 고하라”고 했을 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천사가 하루는 귀한 보물을 가지고 내려와서 손이 제일 예쁜 사람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다가 맨 마지막에 한 집을 찾아가보니 그 집에는 딸 3형제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예쁜 손을 가진 사람에게 보물을 주려고 왔다고 하니 딸 3형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천사님, 제 손을 보세요! 이렇게도 예쁘답니다. 제 손은 고울 뿐만 아니라 언제나 꽃을 만져서 향내가 난답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둘째는 “천사님, 제 손을 보세요. 제 손은 참으로 깨끗합니다. 먼지만 묻어도 시냇물에 가서 늘 씻었답니다” 하고 자랑했습니다. 세째는 “아유 천사님. 제 손은 보실 것도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집안을 치우며 부엌 일만 하기 때문에 겨울이 오면 손이 터져서 물이 나고 언제나 이렇게 험합니다” 하고 수줍어하였습니다. 이때 천사는 세째 딸의 손이 제일 예쁜 손이라고 한 다음. 가지고 온 귀한 보물을 다 주고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디 선생은 말하기를 “많은 사랑은 혀 끝에 있고, 참 사랑은 손 끝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약속대로 인류를 사랑하시어 하늘의 영광도 버리고 이 땅 위에 오셔서 오직 역사의 중심에 십자가를 튼튼히 세우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스승된 도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을 보고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알기 원할 때 자신이 친히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배워 우리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겠습니다.「너희는 세상의 이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시는 축복받은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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