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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의 파멸을 바라보신 주님의 눈물 (눅 19: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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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생애에 있어 마지막 유월절이 가까왔습니다. 이 유월절은 주님 생애의 마지막 주간이요, 이 주간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하실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나귀를 타시고 수만 무리의「호산나」소리 속에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었습니다. 장엄한 승리의 행진이었습니다. 그 몇 일 후 주님께서 감람산 숲속에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 보시고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눅 19:41-44에는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의 파멸을 바라보시면서 너무도 가슴이 답답한 나머지 우셨습니다. 파멸을 앞둔 이루살렘 성을 향한 주님의 애통의 눈물이야말로 고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눈물흘리는 자를 비겁한 자, 약한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 대장부는 눈물을 보이지 않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의 눈물은 무엇을 뜻합니까? 주님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나사로 한 사람을 위해서도 의미심장한 눈물을 흘리셨거늘 하물며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보시고 어찌 우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예루살렘 성에는 선민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곳이기에 주님의 사랑은 절실했습니다. 주님이 왜 우셨겠습니까? 동족의 무지함을 통분히 여기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의파괴와 멸망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데 이 백성은 회개할 줄 모르고 계속 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1. 본문 41-42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의 날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민,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은 동분서주하며 평화의 왕인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소원인 평화의 왕 주님께서 마침내 오시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종려수가 깔린 길을 밟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500년 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응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곧 그들의 메시야를 도리어 십자가에 못박은 무지한 자였습니다. 이들의 무지함을 보시고 통분함을 여기시사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2.본문 43-44의 말씀에 보니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사자들을 박해해온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차례 저들의 각성을 촉구했으나 그들은 깨닫기는 커녕 도리어 주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이 멸망하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압니다. 기원 70년 로마 황제 웨스트 파시안의 아들인 디도 장군이 군사 십 오만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훼파했습니다. 그 당시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있어서 매장할 사람이 없었고 부모가 그 자녀의 시체를 삶아 먹었으며, 자기 무덤을 파고 들어가서 죽기를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은 함락이 되어 죽은 자가 110만, 노예로 끌려간 자가 9만 7천명, 예루살렘 성 외에서 피살된 자가 42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수십 년 후의 사실을 보시고 예루살렘 성을 위해 우신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성은 어떠한 도성이었습니까?

(1) 밖에서 보신 예루살렘 성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신 예루살렘 성은 평화가 아니요, 살륙의 검은 구름이 덮힌 슬픈 도성이었습니다. 원수들이 도성을 쌓고 포위하고 예루살렘 성에 사는 자녀들은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고 파괴될 전쟁과 살육의 날이 임박해 오는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한 무리들은 혹은 예루살렘의 영화를 노래하며 자못 의기양양하였던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정치를 잘하기 때문에 이 성은 안보에 안심해도 된다고 장담했고, 종교가들은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며, 한 주간에 두 번 금식기도를 하기 때문에 축복받을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개구리도 뱀의 입에 빨려들어가게 되면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지르는 법이어늘 예루살렘 성은 멸망의 입으로 서서히 빨려들어가면서도 몸부림조차 하지 못하는 신경 마비중에 걸렸으니 주님께서는 우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남의 이야기이며 옛날의 이야기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각성할 말씀이며, 한국 교회가 각성해야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한국 교회를 위해 우시고 계십니다.

(2) 안에서 보신 예루살렘 성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주님은 성전을 찾아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 정세를 알아볼 생각이라면 헤롯궁을 찾아가야 할 것이요, 교육실태를 살펴볼 마음이라면 가말리엘 학원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경제 동향을 알아보려면 시장을 찾아가서 상품의 양과 자질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전에 찾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신앙심을 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나라의 신앙생활을 보면 그 나라의 장래를 점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바로 서지 못하면 정치, 경제, 교육이 아무리 잘되어도 미구에 부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신 예루살렘 성의 내부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도할 제단은 가축시장, 금융시장, 모리의 횡령, 부정과 금전의 세도가 제단 옆에서 판을 치고 성전 안에는 우양의 변비로 악취가 가득하고 성전이나, 시장이나, 종교나, 세속이나 피장파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사보다 영리, 생명보다 제도에 치우친 형식적 종교, 타락한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의 긴박성을 아시고 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의 징조를 유심히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오늘날까지 2,000년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길지 모르나 그날은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오늘날은 주님의 복음을 외쳐도 듣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울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전혀 무감감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우리 앞에 놓인 거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읽고, 듣고, 탐구하여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시기를 바랍니다. 주림 재림의 권고받는 날이 이르기 전, 이루살렘 지상의 도성이 멸망의 날이 오기 전에 무지에서 깨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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