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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라바와 예수 (눅 23: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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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예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으려고 네 가지 일을 시도하며 예수의 판결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 첫째는 이 문제를 유대인들 스스로 해결하라고 한 것이고(요 19:6-7), 둘째는 헤롯에게 이 사건을 맡기려고 한 것이며, 세째는 유대인들을 설득해서 유월절마다 특사하는 죄수를 예수로 하자고 한 것이며(막 15:6), 네째는 그가 예수를 때려서 유대인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려 놓아 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유대인 군중에 의해 결국은 예수를 그들에게 내어주고 만 것입니다. 당시 로마법은 공정한 공의의 법의 시행을 위해 어떤 지방에서도 행정관의 실책이 드러나면 그 지역 사람들이 로마에 보고하여 행정관이 조사받고 그 결과 비리가 드러나면 엄하게 취급되었습니다. 당시 빌라도는 팔레스틴에 대해 두 가지 실책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첫째, 로마법은 그 어느 지역에든지 식민지로 주둔하면 황제상과 군기를 그 나라 수도의 한복판에 세워야 한다고 제정하고 있는데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주둔할 때, 이 법을 시행하려 했으나 유대 시민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다는 격렬한 반대로 이 법의 시행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가 이 법의 시행을 위해 강력한 정책을 펼 수 있었지만 온 예루살렘 시민들이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자기들의 목을 내밀며 율법의 지혜가 침해당하기 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빌라도가 그만 양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빌라도는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에 팔레스틴의 행정 수도를 세울 계획으로 그 자금 조달을 성전에서 걷을 것을 계획했습니다(눅 13:1-4). 이것은 당시 법률상으로 위법이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해 로마에 보고하면 의심할 것 없이 빌라도는 즉시 실각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특사로 바라바를 놓아줄까? 예수를 놓아 줄까? 라고 하는 빌라도의 제의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요 19:12)”라고 말했을 때 자신의 실각이 두려워 빌라도가 올바른 재판을 하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목을 좌우하는 공식적인 보고를 로마에 하겠다는 협박을 내세움으로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를 사형에 처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를 빌라도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를 미워한 유대의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파 사람과 같은 지도층의 흉계와 모략을 생각해야 하고 예수님과 같은 의인은 못박아 죽이도록 하면서 바라바와 같은 살인범은 석방시키라고 외치던 무지하고 몽매한 예루살렘의 군중들의 역할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라바는 행복한 사나이였습니다. 그 나라 법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이른바 그 나라 지도층과 행정당국과의 정치적인 흥정의 덕택으로 그는 죽음의 자리에서 풀려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의와 진실로써 마땅히 석방되어야 할 사람이었지만, 정치 권력층과 지도층의 흥정에 의해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런 결과는 군중들의 무지함에 기인합니다. 군중이라는 것은 영리한 것 같으면서도 어떤 분위기 앞에서는 정의감도 헌신짝처럼 내어버리고 어떤 힘 앞에서도 아무 말도 못하고 굴복하고 마는 존재입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민심도 어떤 조직적인 악, 불의간 악의 세력 앞에서는 천심이 아니라 악마의 마음으로 바뀌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무리들이야 지도자의 지도대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맹종하는 것은 잘못을 범하는 지도자와 함께 죄를 범하는 공범자가 된 것입니다. 살인자 바라바를 석방하게 되고 의로운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도록 외친 무리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배척하거나 반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 예수를 지지하고 환영 했던 무리 들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주님 주위에는 항상 많은 군중에서 둘러쌓여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막 2:2에 많은 사람이 모여 문 앞에라도 용신할 틈이 없다고 했으며, 막 3:10에는 주님께서는 식사할 겨를도 없을만큼 많은 무리들이 그들을 찾아 왔고 이 많은 무리가 어떤 때는 4천명, 5천명이나 따라다녔다고 했습니다. 또 눅 12:1에는 무리들이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정도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무리들이 마을로, 산으로, 들판으로, 바닷가로, 회당으로, 개인집으로 예수님 가시는 곳마다 예수님께서 기거하시는 곳마다 예수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의 능력의 혜택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새 몸, 새 마음, 새 생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무리들에게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소서”, “살인범 바라바를 석방하소서”라는 외침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그 무리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며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고 또 손에 잡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을 받으사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찬송을 하더라”고 환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환영의 분위기는 불과 한주일이 못되어 자기들이 환영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만이 어리석은 대중이 아니라 오늘 20세기 후반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러한 우매한 민중들이라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또는 무비판적으로 국가나 교계의 지도자들을 그저 따라 다니다가 국가에 대해서나 교회에 대해서 바른 말 한 번 못하고 그들이 짓는 죄에 동참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믿는 자의 순종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망각한 채 말입니다. 또한 무지한 대중도 문제이거니와 역사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고 양심을 지킬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매한 군중을 죄악으로 몰아넣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살인범 바라바를 유대 총독 빌라도나 유대의 지도자들은 역사를 흐리게 한 지도력을 보였고, 또한 무리들의 무지한 그들의 부정을 알고도 모른척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소리질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죄 값은 결국 그들의 나라를 잃어버린채 2,000년간을 세계 도처에서 헤매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정의를 보고 정의를 지지하고 불의에 끌려가는 자리에 함께 동조해서는 안될 것이며 그런 자리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정의에 바로 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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