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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와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 0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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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대화의 말씀이 열 한 번 나타나고 있으며 그 중 에 첫째가 본문에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 사용되어 있는 말은 단순하나 여기 표현되어 있는 사상은 극히 심오합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 버나드는 이 기사가 예수님의 생의 초기나 중기가 아니고, 즉 첫 대화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전에 둔 시기에 속하는 대화일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2절 말씀에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구절은 예수님의 하반기의 박해 때문에 밤에 숨어서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대화의 시기는 접어두고 밤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중생에 대한 대화를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1절에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의 정복자, 백성의 승리자라는 뜻으로 공관복음에는 기록이 없고 요한복음에 세 차례(본 문, 7:50, 19:39) 출현합니다. 니고데모는 이 구절들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전통적인 종교가였습니다. 십일조를 꼭 드리고,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의식을 꼭 드리는 자였습니다. 둘째,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그 위치는 유대에 칠십인 공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습니다. 이 직책은 아주 권세있는 자리입니다. 셋째, 10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를 알지 못하느냐”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백성의 랍비였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실로 모든 조건을 갖춘 유망한 사람이며, 국민이 부러워하는 교양있고 사색 깊은 유대인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넷째, 니고데모는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에 예수님을 찾았다고 한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으나 밤에 찾아오는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신분 때문에 그리스도와 적이 되었고 니고데모는 그의 높은 신분 때문에 예수님을 신앙하되 소극적 신앙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다섯째,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철저했습니다. 2절 말씀에 “랍비여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 니이다.” 니고데모의 이 고백은 예수님의 출처가 하나님에게서부터이며 예수님의 지상 활동이 하나님으로서의 활동을 하시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같이 니고데모는 우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훌륭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니고데모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니고데모에 대한 태도는 매우 냉담하였습니다.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니고데모의 질문에 쐐기를 박았던 것은 바로 이 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중심을 보시고 대답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지상의 메시야 왕국을 촛점으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 세계, 가변적인 세계가 아닌 거듭나야 하는 신령한 세계인 것입니다.

2.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중심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 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차알스 스퍼전이 목자의 자성이라는 제목으로 했던 유명한 설교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가 되려고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하고, 또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거듭나지 못 한 사람의 설교는 아무리 다른 것을 많이 안다고 하여도 그 설교는 은혜 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19세기 때의 교역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나라나, 어떤 교역자에게나 다 필요한 말씀인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장로에게도 필요하고, 집사에게도 필요하고, 권찰에게도 필요하고, 주일학교 반사에게도 필요한, 모든 믿는 자에게는 제일 중요한 말인줄 믿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에 거듭난다는 말씀은 원어로 “위에서 난다,” “위에서 처음부터”라는 뜻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깨닫기 어려운 영적인 일이라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신비한 것이라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우주는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 생의 백년 미만의 시간 속에서 우주를 볼 때에 단조롭고 신비하지 않으나 우리의 한계점인 백년을 넘어서 영원에서 볼 때에는 우주의 생성 소멸의 과정,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하기만 한 것 입니다. 중생도 신비한 것입니다. 이 신비한 중생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길 가던 어떤 분에게 “거듭났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모르시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이 중생의 경험은 어떤 분은 갑자기 오기도 하고, 어떤 분은 시일이 요구해서 천천히 거듭나서 자신도 모르는 분이 있습니다. 중생의 모양은 이처럼 여러 가지 말씀으로 드릴수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에 주님을 의지하여 가슴치며 통회의 회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세째,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 으셔야 합니다. 다른 건 염려없습니다. 내 생활 중심이 그리스도께서 지시 하신대로 산다면 중생의 삶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것 같으나 거듭난 자에게는 쉽습니다. 그러나 중생이 되지 못한 자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일른지도 모릅니다. 결국 중생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며 주님을 모시는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예수님께서는 거듭나는 조건으로써 물과 성령으로 다시 거듭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물이라는 것은 물 세례를 말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 크리소스토무스, 웨스트콧과 중세기의 버나드는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물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세례 의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인 물로 세례를 주는 과정에 있었던 신앙고백을 토대로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물에 대해서 더 깊이 문제를 파헤친 사람은 존 칼빈입니다. 칼빈은 본문의 물을 성령이라고 보아 본문 말씀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이중으로 강조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칼빈은 물을 성령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성 령의 역할은 회개와 죄사함으로 봅니다. 또한 후자의 성령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성령의 역사의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죄 회개와 죄 사함의 물의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을 주로 받아 모시는 성령의 역사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깊은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8절의 말씀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헬라어로 본문은 바람을 「프뉴마」라 기록했는데 바람과 성령은 같은 낱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람을 「루아하」라 하여 역시 성령과 같은 날말로 사용합니다. 이 원어 「프뉴마」 라는 단어는 신약에 370회 나타납니다.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 성령으로 번역되었으나 바람이라는 날말로 번역 하기는 본문과 히 1:7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설교를 자연을 보면서 비유를 들어 하시는 예가 많습니다. 들에 피는 백합. 샤론의 장미꽃, 공중의 새를 보라 등등 여기 바람이라고 설교를 하시는 것도 이처럼 자연의 현상을 비유한 것입니다. 바람과 성령의 같은 점 무엇입니까? 첫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점입니다. 즉 행 8:39에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물로 세례 준 이후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 하니라”하신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흔연히 거동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바람처럼 사람의 계획을 초월해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 자체는 보지지 않으면서 그 역산의 표적은 보이는 것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째, 인간의 의지로 바람을 좌우할 수 없듯이 성령도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흥회를 매번 좇으면서 신비 체험을 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은 결코 누구의 점유물이 아닙니다.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니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인자란 말은 주로 예수님이 자기에 대하여 표현한 말입니다. 마태 32회, 마가 15회, 누가 25회, 요한 12회 등 모두 4복음서에 84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나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인자라고 부른 예는 3회 뿐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스데반의 순교시 행 7:56에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고 둘째,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기록할 때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계 1:13)라고 표현하였으며 세째, 사도 요한이 계 14:14에서 “인자와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고 하였습니다. 인자란 뜻은 자기를 낮추는 겸허한 칭호이기도 하며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메시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인자로 오심은 온 인류에게는 큰 명예이며 인류에게 큰 소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스스로 부르는 한 인간은 절망이 없고 죄악 속에 소멸되는 인간이 아니라 소망의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능력 14-15의 말씀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 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은 사십년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중에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에 불뱀을 보냈습니다. 사막에 흔히 있는 뱀으로 그 비늘이 불처럼 빛나는 독사입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불뱀에게 물려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지도자 모세는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서 불뱀에게 물린 자는 구리 뱀을 쳐다보라고 했습니다. 쳐다보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쳐다보는 순종을 필요로 합니다. 믿음으로 본 자는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우리의 죄로 인해 죽은 자신들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든 장대에 맨 뱀을 보면 살듯이 십자가만 바라보면 생명을 얻는다고 지금도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인간의 수고라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수고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십자가에서 시선을 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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