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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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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이적 가운데 하나인데 요한복음에 기록된 이적은 그 수에 있어서 많지 않되 그 기록된 내용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기사도 적지 않은 분량으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유대 명절과 베데스다 1절 말씀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1년에 다섯 가지 큰 명절이 있으나 의무로 되어있는 명절, 즉 예루살렘 주위 32km 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이 법적으로 참석치 않으면 안될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입니다. 유대의 명절은 대략 다섯 가지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부림절:3월에 지키는 명절로 에스더 왕후의 지혜로 유대인들이 파사왕으로부터 대량 학살을 당할 위협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

(2) 유월절:4월에 지키는 명절로 유대인들이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에서 해방을 받던 것을 기념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드리는 절기.

(3) 오순절:5월에 지키는 절기인데 구약에서 칠칠절이라고도 하며 원래는 보리 추수를 한 다음 지키는 맥추절입니다.

(4) 초막절:10월에 지키는 명절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의 사십 년 광야생활에서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을 기념으로 사십년 동안의 초막생활을 상기하는 절기.

(5) 수전절:12월에 지키는 명절로 유대의 독립운동가 마카비와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 하여 반란을 일으켜 성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 다섯 가지 명절 중에 이때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명절은 어떤 것인가? 요 4:35에 봄이 가까와 오고 있다라는 기록과 요 6:4에 유월절이 가까와 있다는 전후의 귀절을 보아 유대인이 3월에 지키는 부림절이라 생각한다면 바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와 명절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첫 해 요 1:1-2:12 4월 이전 2:13-25 4월 유월절(2:13) 3:4월 이후 4:12월 중순 (4:35) 그리스도의 공생애 다음 해 5:1-9 3월 부림절(5:1) 6:4월 유월절(6:10) 7-8:10월 장막절(7:1) 9-10:12월 수전절(10:22) 그리스도의 공생애 마지막 해 11:12월 이후 4월 이전 12:4월 유월절 직전(12:1) 13:-19:4월 유월절 20:-21:4월 유월절 3일 이후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이스라엘의 절기를 지키시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대의 예배제도의 의무를 무시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역사와 전 통이 오래된 민족의 명절에도 축제 분위기 속에 동화되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홀로 명절에서 소외된 음침하고 괴로운 인간의 삶의 투쟁이 계속되는 베데스다 못가로 가셨다는 것은 그의 전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편이기도 합니다. 2절 말씀에 “예루살렘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 긍휼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시나이 사본에는 「벧자다」로 기록되어 올리브 집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베데스다로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못은 길이 17m로 1888년 히어쉬크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은 그 위에 기념교회가 설립되어 그 출입문에는 성경 본문이 각 국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못의 아래에는 지하수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때때로 그 지하수가 부글부글 거품을 내면서 괴어 올라와서 연못물을 동하게 했습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천사가 이 못을 동요하는 것으로 믿고 천사가 물을 동할 때 즉시 그 물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고통받아온 질병에서 나음을 받는다고 믿어왔습니다. 특히 고대 사람들은 물에 대하여 강이나 우물물의 신성함에 유독 감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프레이저 경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민속학이라는 책에서 물을 숭배하는 예를 많이 들고 있습니다. 헬라 시인 헤시오드는 강을 건널 때에 손을 반드시 씻고 기도했다고 했으며, 파사왕 케르케스는 마술사를 통하여 백마를 강의 제물로 드리고 난 후에야 그의 군대가 스트리몬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했으며, 로마의 장군 루쿨루스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때에 황소 한 마리를 제물로 드리고서야 그의 군대가 그 강을 건넜다고 했으며, 오늘날에도 동남 아프리카에 있는 반투족들은 강을 건널 때에는 반드시 한줌이나 다른 제물을 강에 뿌리고 건넌다고 하여 중앙 아프리카에 있는 바간다 족은 강물에 사람이 휩쓸려 가면 물 귀신이 그를 데려가는 것이라고 하여 구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강이나 시내나 우물을 성스럽게 여기는 신앙은 과거에 보편적으로 되어 있었고 아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이 동하기를 바라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시대가 가지고 있던 신앙을 믿고 있는 그 시대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2. 삼십 팔년 전 병자가 있더라 5절 말씀에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환자의 이름이 무엇이며 누구이며 무엇하던 사람이며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도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좌우간 날 때부터 앓았다고 해도 삼십 팔세가 되었을 터이니 이 사람은 평생을 고생해 온 사람입니다. 7절 말씀에 물이 움직일 때 저를 못에 들어가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아마도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었거니와 있었다 하더라도 모두 그를 버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참으로 그는 버림받은 불쌍한 영혼이었습니다. 날마다 베데스다 못 옆 다섯 행각에서는 율법서 다섯 권을 낭독하고 강론하여 병자를 위문했으나 그 누구 하나 삼십 팔년 병자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도와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환자는 처음에는 몸을 고쳐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누구하나 와서 저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주님이 찾아갔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언제나 친구 없는 자의 친구가 되셨고 아무런 도움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조력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유일한 소망은 그를 도우려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긍휼뿐이었습니다. 긍휼을 요구하는 것이 이 환자 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죄악은 이 환자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베데스다에서 이 병자에게 은총을 내리신 주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은총을 우리에게도 내리실 것을 믿습니다. 삼십 팔년은 이스라엘 광야에서 헤맨 광야의 세월 수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불신앙의 년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깨우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3. 네가 낫고자 하느냐 6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 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삼십 팔년 환자는 이 제 병으로 지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기를 도와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치료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금 예수는 소망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입니다. 이 질문에 만일 마음의 깊은 곳에서 현재 상태에 만족해 있었다면 아무런 변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욕망이 없다면 신앙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소원이 있는 곳에서만 있습니다. 소원이 적으면 신앙도 적습니다. 크리스챤에게 절망이란 교만을 뜻하며, 힘이 없다고 낙심하는 것은 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무시함이요, 죄가 있다고 낙심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보혈 흘리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 39:7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뭇사람들은 이 삼십 팔년 된 병자처럼 낫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진정으로 갖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십 사년을 수일 같이 일한 것처럼(창 29:20) 땅의 것을 위해서는 그 소원이 간절하나 하나님을 향한 소원은 미지근하고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가진다고 하여도 그밖의 소원들이 너무 많아서 복잡성을 이루니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 그만 질식되고 맙니다. 지금 이 시간 주님께서 찾아오시어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의 말씀에 “할렐루야 아멘 주여 나는 주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라는 대답이 계시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4.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8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네 죄냐, 네 부모의 죄냐 따지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인데 할 수 있다, 없다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누운 채 남의 도움이 아니면 하루의 생도 유지할 수 없는 가련한 인간, 자타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폐인, 삼십 팔년 된 환자에게 던지는 주님의 말씀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입니다. 삼십 팔년 된 환자는 이 말을 믿었습니다.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믿고 일어나려 했습니다. 기적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일어나라 하십니다.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삼십 팔년 된 환자는 순종으로 일어나려 행동으로 옮길 때 두 발에 힘이 생기고 병은 가시고 완전히 치료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또한 “자리를 들고 가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의 침상은 단순히 가벼운 들것과 같이 조립된 것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헬라 원어로는 “짚으로 만든 자리”를 뜻하며 빈민들의 침상을 의미합니다. 그 병자에게 크랍바토스(자리)는 삼십 팔년간 병들어 누웠던 자리였고 남의 도움만 기다리던 자리였으며 모든 것을 소비만 하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들고 가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몸만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짊어 들고 그리스도에게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이제 주 앞에 구원받은 우리도 우리의 죄의 자리를 들고 주님 앞에 가야 할 것입니다. 자리를 들고 가라는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세상들, 가정의 문제들, 개인의 문제들,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 괴로운 세상 짐을 지고, 즉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산에서의 “여기가 좋사오니”가 아닙니다. 죄 많은 세상 속에서 자리를 들고 가는, 즉 십자가를 지고 가는 종교입니다. 삼십 팔년의 중풍병자처럼 유대인은 삼십 팔년의 광야의 생활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들어설 때 삼십 팔년 동안 지켜주시던 법궤를 들고 갔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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