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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생활과 절제 (고전 0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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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여기 이기기를 다투는 자라고 하는 뜻은 운동선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좋은 스포츠맨이 되려고 한다면 모든 일에 절제할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훈련을 할 때에도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하거든 하물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우리는 더욱 절제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만 이렇게 권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27절 말씀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항상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케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절제를 의미합니다. 절제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극기, 자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 안에는 여러 가지 욕망과 본능이 있습니다. 이 욕망과 본능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절제라고 합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이 인간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덕에 대해 말할 때 절제를 말한다고 합니다. 고대 헬라 아덴 사람들은 젊은이에게 권면한 말들이 있습니다. 첫째, 네 자신을 잘 알라는 말씀이요 둘째, 네 자신을 다스리라는 말씀입니다. 플라톤은 말하기를 인간 생활이란 검은 말과 횐 말, 즉 두 말이 끄는 한 수레와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흰 말은 이성을 의미했고 검은 말은 욕망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레가 넘어지지 않고 바로 가려고 하면 흰말이 수레를 어거해서 나가게 해야지 검은 말에게 맡기면 수레가 아주 외딴 길로 떨어져 부서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제를 의미합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세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젊었을 때는 색에 경계하고 장년이 되면 혈기에 조심하고 노년에는 욕심이 많아지니, 욕심에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절제를 배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욕망 가운데 두 가지 욕망에 대해서 생각코자 합니다. 하나는 먹고자 하는 욕망이요 하나는 정으로 오는 정욕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먹는 시험에 낙제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처음 전파하실 때 사십 일간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후 사탄이 찾아와 시험을 하는데 그 첫 시험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여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에서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느니라 하여 먹는 것에 대한 시험을 이겼습니다. 창세기에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에서는 먹는 것인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미련한 에서와 같이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여 시험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오늘날 인격을 팔고 양심을 팔고 명예를 팔고 가정의 전통을 팔고 심지어 신앙도 팔고 나라까지 파는 자가 있습니다. 독일의 속담입니다. 「물에 빠져 죽는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는 자가 더 많더라」. 또 미국 속담입니다.「인간의 두뇌에 알콜을 붓는 것은 기계에 모래를 뿌리는 것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술먹는 개라는 한국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술을 먹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잠언에 보면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할까 두려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꿀이 달지만 과식하면 토합니다. 몸에 좋은 것도 많이 먹으면 해로운데 하물며 우리 육체에 아무런 이익이 없고 손해만 주는 것을 우리 몸에 흡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근년에 담배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암이 담배에서 생긴다는 과학자의 말들도 많이 들었습니다. 절제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첫째, 나를 알고 내 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몇년 전 대구 명성 예식장에 가보니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하는데 좋은 차에 꽃을 장식하고 십여대의 차가 계속해서 지나갑니다. 가만히 서서보니 보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결혼식도 좋은 일이요 일생에 한번 있는 것이라 잘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이것은 너무나 한국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결혼식도 절제가 있어야 되는 줄 압니다. 잔치 연회도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강한 본능 가운데 정욕 혹은 성욕도 우리가 다스릴줄 알아야 합니다. 식욕과 함께 성욕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다운 가정의 기초는 이 성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스릴줄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에 힘센 장수 삼손은 정욕을 다스릴 줄 모르다가 망했습니다. 믿음에 덕과 절제를 더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기도하면 성령충만함을 입어 모든 것을 잘 절제할 줄 믿습니다. 결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만으로는 그 결심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고 권능을 받아야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있습니다. 요셉은 고독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욕의 유혹이 들어왔으나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 악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였듯이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퀘이커 교파를 세웠던 죠지 팍스는 젊은 시절에는 구둣방 직공이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술집에서 술먹는 내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밤새껏 마셨습니다. 둘은 내가 낸다. 더 마셔라고 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있는 돈을 다 내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중 가슴이 뭉클합니다. 어두운 거리를 혼자서 올라왔다가 내렸다가 방황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오! 하나님. 이런 세상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 죠지 팍스야 보이지 않느냐. 요사이 젊은이들은 다 방탕으로 내려가고, 늙은이는 다 홈으로 돌아간다. 너는 성결한 생활을 하여라.” 그는 그날 밤 온전히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성결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을 회개시킨 유명한 성경귀절은 롬 13:12-13의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온전히 낮에 거하는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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