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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 (갈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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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을 통해서 그의 사도적 사명과 메시지의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설명했고 이제 3장에는 화제를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영향으로 복음에 대한 그릇된 신앙을 가진 것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지적했습니다. 왜 어리석다고 했겠습니까?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 율법의 멍에를 메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값진 진주를 작은 돌 한 개와 바꾸는 격이니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갈라디아 사람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그들의 신앙이 바울의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권면이요 충고였습니다.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고 했고 3절에는 “너희는 이같이 어리석느냐?”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처음에는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죄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시는 진리를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의 행위 역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고전 1:22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1. 십자가를 밝히 보면서 고전 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인간에 더한 좋은 충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는 청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사역이 선포입니다. 어떤 요구가 아니라 그저 주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런 귀한 복음을 알면서도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예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고 어린아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가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세계 인류를 당신의 품에 부둥켜 안으려 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기는 것 같이 평안과 기쁨과 배부른 곳은 다시 없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고생하는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기었을 때에 기쁨과 배부름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의 살 길은 십자가로 나타난 예수의 사랑 속에 파묻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는 참다운 사랑과 화평과 기쁨의 모든 충만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십자가를 보고 예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돌아오는 것을 볼 때에는 기뻐 반기며 축복하겠지만은 주의 품을 떠나는 것을 볼 때에는 대단히 어리석은 자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절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게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모두 성령을 받았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 바울이 묻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영접했느냐? 아직 영접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주님을 영접한 것이 행위로냐 그렇지 않으면 믿음으로 영접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과 각양 충만한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리겐 교부는 말씀하시기를 “신앙은 영혼의 손이다”고 했습니다. 손은 무엇을 주기도 하고, 무엇을 받기도 하고 또 이일 저일을 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활동하는 힘은 오직 영혼의 손인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신앙이요 성령을 받는 것도 신앙입니다. 남을 도와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신앙으로 합니다.

3.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을 알면서도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요 믿는 우리들의 조상이요 만민의 복의 기관입니다. 만민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 받는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런 축복을 받은 것은 행위로써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직 자녀가 없을 때 약속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그대로 바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에는 확신의 요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후사의 약속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로 여겨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의 믿음으로써 의로운 존재로 받아 들여졌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가 이것을 믿을만한 어떤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주장대로 할례를 받아서 의롭게 된 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켰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것입니다. 축복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축복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아브라함의 후사도 될 수 있습니다. 즉 예수의 십자가만을 통해서 구원과 우리의 모든 소망을 성취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속죄와 구원과 소망과 모든 축복도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의롭다 함을 얻은 모든 신앙은 우리의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 중에는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자가 있었으니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 어리석도다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로 돌아가던 갈라디아인은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위치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복음의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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