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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청산리 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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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중국 측 한 기슭 화룡현 청산리는 무려 80리에 이르는 계곡으로 수십 길이나 되는 자작나무가 자연성을 이루고 있다. 쌓인 나뭇잎이 푹신하여 자연 잠자리의 병영이기도 했다.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일본군 14사단이 남하하고 나남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21사단이 북상하여 한국 독립군 2개 대대를 협공코자 마주친 곳이 바로 이 청산리 협곡이다. 이 전투에서 3300명의 왜적이 죽는 대첩을 이룩한 현장이다.

광복 이전까지는 그곳에 일본사람이 세운 다음과 같은 비석만이 서 있었다. 「대정 9년 10월 대일본군 토벌 불령선인지 전투역 전몰지영령(대일본군 토벌 불령선인지 전투역 전몰지영령)」, 곧 불순한 조선인의 토벌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 영령을 추모한다는 내용의 비석이다. 그 청산리 고전장에 지난주 말 대첩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진작 해야 했던 일이요, 뒤늦게나마 독립군의 원한을 풀어준 셈이다.

청산리전투에서 제2대대장으로 참전했던 철기 이범석 장군으로부터 들은―당시 전투에서 잊혀지지 않은, 그래서 눈감고 죽을 수 없다던― 3명의 부하 이야기가 생각난다. 행군 도중 오발로 전우를 죽게 해서 그 벌칙으로 쇠로 만든 용수를 쓰고 전투에 임했다던 전이란 성의 병사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저 때문에 죽은 전우 몫까지 싸운다고 적진 깊이 뛰어들어가 난사로 60명의 적을 사살하고 전사했다. 소년병인 기관총 사수 최인걸은 후퇴는 없다고 선언, 기관총에 몸을 묶고 포위한 적진을 행해 180도 회전하며 수백의 적을 사살하고 전사했다. 구한국군의 상등병임을 무척 자랑하여 「한상등」으로 불렸다는 한 노병은 이 소년병의 원수를 갚겠다며 전우들이 만류하는 것을 총으로 위협하면서까지 뿌리치고 적진 속에 잠입하여 방랑하며 산발적인 난사작전을 해서 왜병을 공포에 몰아넣었었다. 물론 이 노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철기는 청산리전투에서 불렀다던 「기전사가」를 불렀다. 「하느님 저희들 이후에도/ 천만대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이 한 몸 깨끗이 바치겠사오니/ 빛나는 전사를 하게 하소서. 」 지하에서 눈 못 감고 있을 철기가 청산리대첩비 소식을 듣고 이제야 스르르 눈을 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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