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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운 생명을 위한 산고 (사 66:7-14, 요 1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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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명을 위한 산고(사66:7-14, 요16:16-24)오늘 읽어 드린 두 말씀에 보면, 산고(産苦)와 새생명 탄생의 기쁨이 비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시온이 진통하자마자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하여 고통을 받았지만 그 고통을 잊게 할 큰 기쁨이 찾아올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이는, 너희로 하여금, 위로를 주는 예루살렘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게 하고, 또한 너희로 하여금, 풍요한 젖을 빨아들여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예언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것은 단순히 포로에서 유대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될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고통스러운 삶이 완전히 끝나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올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언자의 예언은 역사 속에서 문자대로 이루어져 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유대 민족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을 때 위의 예언에 있는 대로 그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른 적이 없었고, 풍요한 젖을 빨아 기쁨을 누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은 종말에 일어날 일을 내다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100년 미만의 삶은 새로운 세계로 탄생하기 위한 준비기간이며 여기에 따르는 고통의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산고 끝에 놀라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면서 그 고통을 잊게 해 줄만큼 큰 기쁨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라는 알듯알듯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할 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여인이 해산할 때에는 근심한다.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와 같이, 지금 너희는 슬픔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이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 16:21,22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에게 큰 슬픔과 고통이 될 것이지만, 그의 부활은 놀라운 기쁨이 될 것임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종말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잠시 받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릴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이 땅의 삶에서 받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새로운 생명 속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하느님의 복중에 잉태된 인간지난 3월 10일 “탄생처럼 죽음도 은총이다”라는 설교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완전한 제품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점점 자라고 발전하여 완성되는 존재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배속에 잉태되어 10개월을 지내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점점 자라서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가 나이 들어 죽게 되지만, 그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창조는 이런 삼단계 즉 어머니 배속에 있는 단계, 그 다음 이 세상의 삶의 단계, 그리고 영생의 단계를 통해서 완성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인 이 땅의 삶도 첫 번째 단계처럼 복중기간(腹中期間)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복중에 잉태되어 자라다가 때가 되면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만,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면 우리가 보다 분명하게 우리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또 우리 앞에 약속된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성경에서 하느님을 흔히 ‘긍휼이 여기시는 하느님’이란 표현을 자주 듣게 됩니다. 긍휼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라함”인데 이 말은 원래 여자의 ‘자궁' 또는 ‘모태'를 가리키는 “레헴”에서 온 말입니다. 모태는 바로 생명이 잉태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긍휼은, 여인이 아기를 잉태하고 진통하며 출산하여 그 아기를 자기의 생명의 일부로 알고 사랑하는 그 사랑에 비유됩니다. 자비로운 하느님, 긍휼히 여기시는 하느님은 진통을 통해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긍휼은 모성애(母性愛)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사랑이 바로 모성애라고 할 때, 하느님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런 과정을 거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긍휼은 무조건적이고 이유 없이 부어지는 사랑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은 바로 그가 이스라엘을 잉태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잉태하심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 자식을 올바로 생산하시고자 하느님은 율법도 주시고 예언자도 보내셨으며, 마침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긍휼은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않는 놀라운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그러나 하느님의 긍휼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지으신 만물을 위한 긍휼이십니다. 하느님의 창조가 처음에 다 끝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할 수 없는 긍휼에 의해 마침내 마지막 때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하느님의 긍휼 즉 그의 산고(産苦)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를 잉태하시어 새로운 생명으로 출생케 하시려고 고통을 겪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의 우리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복중에 있는 기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한 가지 더 우리가 복중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신약성경의 말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어귀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히 많이 사용하였고, 요한복음에서도 자주 만나게 됩니다. 특히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5절)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태중(胎中)에 있는 태아(胎兒)를 연상시킵니다. 태아는 복중에 있어서 탯줄로 어머니와 연결이 되어 있어야만 그 생명이 자라고 온전해 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고 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태(胎)인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서 그에게 탯줄로 연결되어 있으면 우리는 자라게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생명은 끝나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태인 그리스도 안에 잉태된 삶이요 충실하게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그로부터 하늘의 영양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느님의 자녀로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삼위일체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산모가 아기를 잉태하면 10개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하면서 그 태아를 양육하게 됩니다. 요즈음 특별히 태아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산모들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며 좋은 음악을 듣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주의를 기울입니다. 태아교육에 임하는 부모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① 부모의 육체 및 정신적 사고를 건강하게 갖고, ② 마음을 다스리고 평안하게 하며, ③ 올바른 영양섭취와 음식물을 바르게 선택하며, ④ 기후나 환경의 변화에 조심하고 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목표를 설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산모가 이런 조건들을 잘 갖추고 성실하게 노력할 때 건강한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하느님은 산모들보다 더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그가 지으신 만물을 잉태하시고 돌봄으로 태교를 실행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기에 적당한 환경을 주셔서 그곳에서 먹을 것을 얻을 뿐 아니라 온갖 필요한 것들을 얻게 하십니다. 선한 목자처럼 우리를 푸른 풀밭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셔서 우리 영혼을 맑게 하시며 우리의 몸을 건강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도록 율법과 예언과 여러 가지 하느님의 계시로 우리를 교육을 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긍휼과 자비는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넘치고 있습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큰사랑은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시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라게 하시고 하느님의 나라의 많은 비밀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심으로 그 나라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알려주셨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케 하시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느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마지막 때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입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뒤를 이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오늘날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어 우리를 양육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온갖 하늘의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로 하느님의 나라를 봉사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그 뜻을 따라 살도록 이끄십니다. 이와 같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전 방위적(全方位的) 돌봄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자라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출생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민한 영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의 이런 돌봄과 교육에 대하여 민감하게 느끼면서 반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적 감각이 죄 때문에 무디어져서 이런 하느님의 긍휼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그들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날 것을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온갖 은총과 교육을 통해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며 준비되어야 할텐데 그런 기회를 잃어버리면서 시간을 허송하고 있습니다.“조금 지나면”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하느님의 복중에서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출생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미래를 부정하고 이 땅의 삶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그의 불완전함과 약함과 무지 때문에 항상 불만일 수밖에 없으며, 쇠약하여져서 병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영원한 생명으로 출생할 것인데, 이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면 결국 그의 삶은 불행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가 주시는 하늘의 양식으로 자신을 충실하게 하기보다는 이 땅에서의 삶을 더욱 만족시키기 위하여 기도하며 복을 빌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의 자세를 버리고 우리의 목표를 영원한 생명에 두고 이를 위해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삶은 안락하고 행복하며 평화를 누리는 삶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며, 거기에는 때로 핍박과 박해가 있으며, 육체적 욕망을 제어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래의 많은 열매를 위해서 오늘 죽어야 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긍휼이 있어야 하고, 불의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해야 된다는 용기와 인내가 있어야 하기에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곧 참고 넘어야 할 해산의 고통이고, 그것을 지나면 그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준다”(고후 4:17)고 하였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좀처럼 새생명의 출생이 가져오는 놀라운 기쁨을 체험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견디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 땅의 삶을 완성으로 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과정으로 이해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의 완성을 위해 부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의 삶을 배우고 그의 말씀을 실천하며 그가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길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충실하게 머물면서 그를 배울 때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더욱 여물어 갈 것이고 마침내 이후에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놀라운 긍휼과 은총으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시며,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눈을 떠 하느님의 역사와 그 섭리를 보게 하시며, 우리의 귀를 열어 그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그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여러분의 삶을 완성으로 이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결코 쇠퇴하거나 퇴보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며 성숙되어 가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의 뿌리를 그리스도 안에 확실하게 내리고 그가 주시는 영의 양식을 통해 더욱 풍성한 삶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이제 여러분을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에 감사하면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아름답게 준비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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