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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허무의식과 탕자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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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잃어 버린 탕자의 집에서 태어난 하나의 전도자입니다. 구약의 솔로몬의 전도서가 쇼펜하우어의 염세 철학과 맞먹을 수가 있읍니다.
만일에 솔로몬에게서 하나님을 뽑아 버린다면 '헛되고 헛되며 헛 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시작한 전도서가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의 비유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현대의 청년들로 하여금 하루속히 쇼펜하우어 같은 허무 의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전환한 사랑의 추적을 하도록 해야 하겠읍니다.
이 허무 의식이 없을 때에는 한 번도 인생에 대한 반성을 해보게 되지 않습니다. 지하도를 가다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그 층층대 위에서 갑자기 자기에게 덮쳐 오는 허무에 사로잡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서 쇼펜하우어적인 허무를 깊이 체험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쇼펜하우어는 현대의 교만과 현대인의 착각과 현대인의 허위와 현대인의 값싼 낙관주의를 철창으로 질그룻을 때려 부수듯이 산산이 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의 의지의 비유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읍니다.
자바섬의 해변가에는 거북이가 해마다 돌아와서 모래 사장 깊숙이 알을 수십 개씩 낳습니다. 이때 숨어 있던 들개들이 달려들어 거북이를 뒤집어서 꼼짝 못하게 해놓고 거북이의 창자를 내어 먹습니다.
등에 두꺼운 딱지가 붙어 있으니까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모래 사장에는 거북이들의 시체가 에스겔서 골짜기의 해골 떼처럼 가득하게 됩니다. 이 비유를 들어서 쇼펜하우어는 묻고 있읍니다. '삶의 의지는 누가 만들었는가? 잡아먹기 위해서 있는 것인가? 잡아먹히기 위해서 있는 것인가?
저러한 일이 삶의 의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들개도 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며,이 거북이도 삶의 의지 속에서 그런 것이라면 생의 의지의 비극이 아닌가?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 또한 잡아먹기 위해서 태어난 것, 이 살육과 전쟁, 무서운 생존 경쟁,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하고 그는 반문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이 모든 생(生)의 현상 원동력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 비극의 의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적인 지옥의 탄식이 나옵니다. 쇼펜하우어는 단테의 지옥보다 더 창백합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밑바닥 속에 흐르고 있는 탕자의 비극과 탕자의 절규를, 탕자의 깊은 탄식과 탕자의 비애를, 탕자의 불행과 탕자의 지옥을 발견해야 될 것입니다. (전 1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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