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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2 (레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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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제물이다.
죄를 위한 제물은 속건제 든 속죄제 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방법이 아니라 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며 성소에서 먹는 교제를 허락하심이다. 물론 속죄 제물은 어디까지 피를 뿌린다는 것이 강조 점으로 되어 있지만 그 제물에 모든 목표는 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성소에 들어와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한다 그것이 핵심이다. 그러니까 이런 저런 부지중에 지은 죄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성소에서 친교 하는 친교에서 끊지를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길을 열으셨기 때문에 그것이 속죄 제물의 강조 점이다.

그러므로 속죄 제물의 기름을 화목 제물 위에 사르며 고기는 소제물처럼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린다 했을 때 속죄제 는 피 뿌리는 것이 강조지 기름은 어디다가 사르고 물론 기름은 거기 나오지만 어떻게 먹는지 하는 것은 강조가 안되어 있다. 그런데 먹는 문제는 제물을 나누는 몫에 있지만 이것은 제사법과 제물을 나누는 법을 함께 읽고 해석해야 할 문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 법에는 피뿌리는 법만 주로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속죄 제물은 죄 사함에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그 제사의 본질들은 그런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상에서 먹는 친교가 결단코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는 생명의 교제 언약의 친교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언약 체결의 본질이다.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은 화나 있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까. 그런 의미로 좁혀서 해석하지 말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속죄가 중심이기 때문에 몫에 대한 말씀은 뒤에서 다른 예물의 몫과 함께 언급이 된다. 제사 드리는 법에서는 나누는 몫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제사장에게 양식으로 주는 것은 소제물에 있다. 하나님 앞에 향기가 되고 제사장은 이것으로 먹고살아라. 소제가 제사장의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열매 향내나는 삶 그것이 곧 거룩한 백성의 삶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음식 드리는 친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삶의 열매를 드리는 문제가 소제의 중심이다.

예수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죄를 속하시고 하늘의 성소에 속한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고 마시고 헌신하게 하신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오직 저희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서 살게 하려 함이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 때 속죄물을 통해서 성소에서 교제하게 하신 하나님이 아들을 속죄물로 세우셔서 하늘에 속한 교제로 완전케하셨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었던 은혜의 역사를 완성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언약 백성이 이런 저런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속하는 단번 속죄물이다. 그분은 참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하늘 성소에서 거룩한 양식이다. 먹는 모든 자가 거룩하리라 했는데 특별히 그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먹는다. 그리고 한 번 더 강조하기를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을지니라 그렇게 확대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제사장이 먹는데다가 강조가 되어 있다. 아직 백성은 못 먹는다. 그래도 이것을 제사장이 먹음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교제의 예물로 드려진 것이다. 그것이 속죄제물의 강조 점이다.

그러면 속건제는 어떤가? 속죄제와 속건제 는 향기를 위하여가 아니라 속죄를 위하여 드린다. 속죄제는 하나님께 죄를 속함 받는 것이 중심이기 때문에 피를 뿌리고 바르는 곳과 죄를 지은 사람의 신분과 제물의 등급과 화목제처럼 기름을 사르는 것이 그 드리는데 있어서 주된 내용이다. 속건제 는 보상이 중심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가 없으며 지정한 대로 성소의 세겔대로 은의 가치에 해당하는 수양을 드리고 본 물에 오분의 일을 더해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주된 내용이다. 갚으라 그 말이다. 그러므로 속건제의 제물을 단에 드리는 제사법은 제물의 몫을 기록한 부분에 배당하였다.

어떻게 제사할 것인가 하는 것도 보상이 강조이기 때문에 처음에 드리는 법에다가 기록하지 않고 제물을 나누는 데다 속건제의 제물을 드리는 법을 기록해 놨다. 왜 속건제 는 보상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다.
속건제의 고기는 속죄제의 고기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특히 속죄 제물의 고기는 지극히 거룩함이 강조되어 있다. 속건제 는 속죄 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나도 이하 동감 그렇게 쓰여져 있다. 지극히 거룩하다는 의미는 속죄 제물에 강조가 되어 있다. 그 먹는 고기에 지극히 거룩한 것은 소제와 속건제와 속죄제 이 세 가지 제물이 지극히 거룩하다. 화목제는 깨끗 한자만 먹는다는 의미로 거룩하지 지극히 거룩함 즉 성소에 속한 거룩함은 아니다. 왜 성소 밖에까지 확대된 음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죄를 위한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방식이 아니라 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화목제의 기름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며 성서에서 먹는 교제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 제물의 기름을 화목제물위에서 사르게 하시며 고기는 소제 물에서처럼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렇게 표현한다. 그냥 지극히 거룩하다 하지 않고 소제물처럼 거룩하다 그렇게 말한다.

소제물은 제사장의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하나님 앞에는 지극히 거룩한 향이고 제사장에게는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런데 속건제 는 거룩한데 소제물처럼 거룩하다. 이렇게 되어 있다. 실은 진노에 대한 문제는 실은 속죄제에 강조가 되어 있다. 왜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막히니까. 그것은 속죄해야 되거든요. 거기서 먹는 것이 거룩하다가 강조가 되어 있다. 왜 거기서 특별히 강조해야 되겠지요. 왜 죄를 위해서 드리고 있으니까. 만일에 이것이 지극히 거룩하다고 강조가 안되면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속죄제물을 드려 놓고 화목제처럼 깨끗한 자만 먹고 부정한 것에 접촉한 자는 부정하다 그러면 이것은 속죄의 완전함이 안되는 것이다. 문맥에서다.

화목제물은 성소 밖에까지 확대되어야 속죄제의 의미로 강화된 것이고 만일에 속죄제물을 먹는데 지극히 거룩하고 내 뜰에서만 먹어라 그렇게 하지 않고 뜰 밖에서도 먹어라 그러면 그것은 속죄제로서 온전하지 못하다 그 말이다. 강조 점이 그러니까 문맥을 따라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건제 물은 소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하다. 먹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또 이것이 접촉된 모든 것이 거룩하리라.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휘장 앞에 나아가는 길이 막히고 죄라는 것은 기도하는 권세가 막히고 그런 데도 불구하고 이 예물을 통해서 모든 죄를 속하고 내 뜰에서 먹으라 했으니 바로 그 속죄제물 안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전부 열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먹는데 강조를 두고 있다. 지극히 거룩하다.

예수는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일 뿐만 아니라 속건제물이시다. 속죄제물과 속건제의 제물이 구별 없이 강조되어 있다. 왜냐면 하나는 죄 책에 대한 강조이면 하나는 죄의 피해에 대한 보상이거든요.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한 책임 벌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속건제의 제물과 속죄제물은 넘어갈 때 어디까지가 속죄제물이고 어디까지가 속건제의 제물인지 정확하게 구별이 안될 만큼 섞어져서 넘어가면서 기록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속건제의 제물이시다. 사53을 길게 인용을 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기 속건제의 제물이 되사 그랬는데 내용은 전부 속죄제물의 의미로 되어 있다. 구별이 안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제물이 되심으로 그들의 영혼들을 구원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온전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새롭고 산 구원의 길이 열렸고 이제는 부활하시는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친교에 참여한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법을 범한 모든 죄의 얼 하나님 앞에 가리운 하나님 앞에 관계가 단절된 모든 죄를 해결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든 피해 보상도 해결이 됐다.

그것은 속죄제의 기름을 드린 것처럼 우리들이 우리의 전생을 그를 위해서 살고 그것이 기름을 드리는 콩팥을 드리는 힘의 삶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소제물처럼 거룩하다 그랬는데 향내 나는 제사를 드리니까 그분 안에서 먹고 마시고 그리고 형제에 대한 보상도 되어 있다. 왜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몸을 드리는 사랑의 봉사로 형제를 봉사하는 삶을 살거든요. 단순한 구제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의 의미가 형제를 봉사함 형제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원하는 봉사적인 삶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우리의 삶의 특질이 그렇게 되어 있다. 거기서 실은 형제에 대한 모든 보상도 오분의 일이 가해진 정도가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시고 속건제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형제를 위해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고 그것이 우리가 주의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이 됐다.

우리가 주의 상에서 먹을 때는 주님 앞에 우리가 온 몸으로 감사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는 형제를 위한 구제를 위해서 한 상에 모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께서 몸을 주셔서 너희를 부요케 하셨으니 너희들의 생명의 것으로 가난한 형제를 부요케 하는 것이 그 은혜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 한 몸에 참여하니까 많이 거둔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다. 구제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다. 오순절에서도 구제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다. 주의 상에서 먹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산다. 그렇게 해서 형제에 대한 사랑의 봉사 갚음이 끝난 것이다. 완성된 것이다

만일에 교회가 그렇게 먹지 않으면 한 구제 단체로 그렇게 먹으면 모를까 생명의 본질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옳은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오분의 일 보상이 여러분이 남의 닭을 훔쳐먹었으니까 구약에 보니까 오분의 일 보상 아 갚아야 되겠구나 우리는 그전에 설교를 그렇게 들었다. 그리고 지금 죄가 떠오르면 당장에 적어 두고 지금 당장 나가든지 전보를 치든지 고백을 해라 왜 마귀라는 것은 쥐꼬리 비슷해서 생각났다 다음에 회개하려고 하면 다 들어가 버리고 없으니까 당장 해라 우리 경험상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떠오를 때 즉각 적어 뒀다가 내일 고백하려고 하면 그 쥐꼬리가 사라지고 없으니까 당장 전화를 해라 그렇게 하고 갔다 갚아라. 그냥 남 몰래 담을 넘어서 던져 놓지 말고 안수하고 갚으라 했으니까 다 고백하고 갚아라 그리고 거기다가 오분이 일을 더하라고 그랬는데 봐라 오분의 일은 이제 신식 이자 계산 한 것이다. 그 때는 오분의 일만 갚으면 되는데 세월이 몇 년이냐 그러니까 오분의 일이라는 것은 마음에 섭섭함이 없이 갚으라는 말이 아니냐 그러니까 충분히 갚아라 이제 오분이 일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 소위 성장한 정신에 맞아 들어가는 것 같지요?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갚으라는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갚음은 예수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봉사로 형제의 종이 됨으로 갚아 지는 것이지 얼마를 갚음으로 당신하고 계산 끝 이것으로 갚아 지는 것이 아니다. 신약에는 그런 율례로 살지 않는다. 한 몸에 교제의 생명으로 산다. 그것이 몸으로 사는 것이고 갚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를 짐지는 것이지 얼마 갚고 나는 끝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약 같은 율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히브리서도 그렇게 전부 레위기의 언어로 예수의 구원의 일들을 설명하고 또 이 구원의 교제 성소의 교제 문제로 신약 성도의 삶을 전부 설명하는데 우리들은 이쪽은 설교를 못하고 부흥사나 이것 가지고 다니면서 무엇 내고 무엇 내고 하는데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헌금 많이 해도 소 한 마리 내기 힘들 것이다. 그래 놓고는 어디 교회는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 처음에 교회 개척할 때 십일조만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큼 거룩한 종이여 처음에 교회 개척할 때 십일조 내는 사람 얼마 안되거든. 이제 초신자들이라.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십일조 낸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면 열 명만 내면 한 재산이다. 십일조 낸다고 해도 그런데 교회가 커지니까 이제 대부자가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교회것 나머지는 전부 목사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구원으로 해석을 하지 않고 교회에서 재산 나눈 법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헌금 나누는 법으로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큼 어리석은 일이 되냐 그 말이다.

이것은 반찬 나누는 방법이 아니라 구약에서 가슴과 뒷다리는 가장 소중한 기관으로 알고 하나님의 상에 드리면 그것은 제사장의 몫이다. 그렇게 친교를 나타내는 방식이지 음식물 나누는 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들을 항상 기독론적인 해석을 했을 때만 구약의 어린아이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전 몸으로 헌신하고 사랑의 종이 되는 완전한 헌신의 삶이 되고 그것이 곧 우리가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참 생명의 교제다. 그것은 하늘의 속한 것을 먹는 영원한 생명의 교제다. 그렇게 산다.

다음에 속건제물의 끝에 보면 제물 나누는 법도 다시 나오니까 그 때 다시 이것에 나타난 일을 한 번 반복하면서 제물 나누는 몫만 강조해서 한 번 풀면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막 예수께 붙이려고 영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 당시 제물 드리는 법 그 문장에서 어떻게 드리는가 그런 문제들을 문학 형식을 따라서 비교하고 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한 장막에서 만나신다는 언약 친교의 배경에서 해석을 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선언하고 있다. 기독론적인 해석이 교회가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는 예수님의 속죄제고 어디까지는 속건제인가 그런 것을 나누어서는 안된다. 그는 모든 예물이 그에게서 완성이 된 것이기 때문에 나누어서는 안된다. 십자가에 죽은 것은 속죄제 그리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소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전체를 드린 것은 번제 그런 식으로 나누어서는 안된다.

그 제사가 그의 인격과 사역에서 완성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분리해서 구분하면 안된다. 속건제도 돈으로 갚으려고 하지 말라 그 말이다. 평생 형제의 사랑의 종으로 수고하는 것에서 온전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강론하면 죄가 막 떠올라서 빨리 가서 회개해야지 이런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말씀을 들은 자체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안함과 완전함을 누리고 거기는 죄의 욕구가 없다. 그것은 이 부분은 내것 하는 욕구가 없다. 그렇게 믿음으로 깨어 있는 것이 여러분의 모든 삶에 나타나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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