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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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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에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기사가 있다. 그냥 내용을 따라 제목을 따라 붙이지 않고 그냥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그렇게 붙였다. 문단을 나누면 성경 본문에 나누어진 대로 나눴다.
1-7절, 거기는 나답과 아비후에 대한 기사가 있고 8-11절은 술을 금하라 하는 내용이 있고 12-15절은 이제 취임식에 제물을 먹어라 하는 이야기가 있고 16절 이하에는 그 속죄 제물을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고 또는 인정하는 그런 내용이다.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을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제사장의 취임식에서 일어났다. 취임식의 식사의 명령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답과 아비후 죽음은 그냥 이러 이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는 도덕적인 훈계를 하기 위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취임식에 있었던 사건이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장의 취임과 관계되는 이야기다 그런 말이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서 나와서 백성을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고 여호와의 불이 단위에 불을 살랐고 백성은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려 경배하였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미암아 세우신 제사장이 자기와 백성을 대신해서 단에 드린 예물을 기뻐 받으신 것이다. 단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고 강림하여 백성을 만나시고 복주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드리는 향도 단위의 불로 드린다.

지금 10장을 해석할 때 조심할 점은 그 법대로 안 드려서 벌주었으까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한다 하는 그런 교리를 위한 것도 아니고 또 술먹고 취해서 잘못하면 안되니까 술취하지 말라는 그런데 강조 점을 둔 것도 아니고 제사장의 취임식 첫 직무 수행에서 나타난 일들이다. 그러니까 구약 제사장의 직무 수행과 관계된 의미로 풀어야 되겠다 그런 말이다.
그러면 이 단위에 하나님의 불이 나타나서 단위에 제물을 다 살랐다. 언제 그랬냐 하면 회막에 모세와 아론이 들어갔다 나와서 축복하니까 그 축복에 응답해서 하나님이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불이 단위에 제물을 다 살랐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로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는데 제사장을 자기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가 나와서 축복할 때 마치 하나님도 그 백성을 축복하는 것처럼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고 영광의 불로 사르셨다. 그러니까 이 단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고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고 자기 백성을 만나서 복주시는 곳이다 하는 출애굽기 20장 언약 체결의 문제가 여기서 확증되고 있다.

20을 보면 나에게 토단을 쌓고 단은 내 이름을 두는 곳이고 내가 거기 강림해서 백성에게 복을 주리라. 그렇게 했는데 이제 그 단을 쌓고 취임식으로 첫 직무 수행을 했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고 불이 나타나 살랐는데 제사장의 축복에 응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니까 이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예물을 드리는 자인데 그리고 그들을 축복하는 자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제사장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제사장이 드린 그 예물을 기뻐하여 사르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16-

1.12절을 보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16장에 있는데 그 때는 먼저 단의 불로 향을 살라 가지고 향연을 가득하게 해서 지성소를 가리우고 그리고 그 다음에 피를 가지고 와서 일곱 번 뿌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어떤 불로 제사해라 하는 말도 없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할 수 있냐? 그런데 레위기는 지금 어떤 불로 제사하는가 그런 문제를 말하고 있는 조항이 아니고 항상 문맥에서 풀어야 한다고 그랬다.

그런데 16장에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향연으로 가리워야 하는데 향연을 사르는 불은 단위의 불이다. 그러니까 단위에 불과 지성소와 연결이 되어 있다. 지성소에 구름 가운데 계신 분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신 분 가까이 가지 못할 소멸하는 불로 계신분 그분이 단위에 나타나서 예물을 받으신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향을 사르는 것도 실은 이 단위에 불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드렸을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로 여호와 앞에 분향을 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하였다. 아마 내 생각에는 겁나서 그랬던 것같다. 백성들이 다 엎드려서 경배했거든요. 감히 거기 나가서 불붙일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아론에게 일렀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명을 어기고 향을 사른 제사장을 죽이심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제사장에게 나타내시고 이로 말미암아 백성에게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여호와의 영광은 모세와 아론의 축복에 의하여 단위의 제물을 여호와의 불로 사르셨으며 동시에 여호와의 명을 어긴 제사장을 사르셨다.

이것을 단순히 법리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가 자기를 순종하면 거기서 영광을 받으시고 만일에 순종을 하지 않으면 죽이시고 죽이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인데 왜 거기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시니까! 단순히 그런 법리적인 문제보다는 제사장을 하나님의 단에서 봉사하는 자로 세우셨다. 단이 제사장이 봉사하는 자리다. 그런데 그 단의 봉사를 하나님이 불로 사르셔서 마치 지성소에서 자기의 제사장을 만나신 것처럼 그 제사장의 축복에 응답해서 사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얼마큼 사랑하시는가 하는 관계를 나타내셨다. 백성이 다 소리지르고 엎드렸다. 구약에 엎드린 것은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마땅히 어디서 불을 붙여라 마라 하는 말이 없어도 여호와의 불이 예물을 살랐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그 예물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향도 그 불로 사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제사장이 거기에 나가기를 두려워 한 것 같다. 그리고 다른 불로 하나님 앞에 불을 살랐다. 그러니까 이 제사장은 하나님이 그를 가까이 와서 단위에서 봉사하도록 부르시고 그 단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로 복주셨는데 그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불로 드릴 것 같으면 그것은 그들 중에 임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신 일에 아론은 잠잠하므로 여호와를 시인하였다. 여기 3절 끝에 보면 아론이 잠잠하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시39편9절을 봐도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그러니 사람은 그 앞에 잠잠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신인하고 잠잠히 있었다. 죽은 제사장의 시신은 그의 친족이 옷을 입은 그대로 진 밖으로 내어갔다. 옷을 입은 그대로 진 밖으로 내어간 이유는 그 시신에 이 죽음이 접촉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옷을 벗겨서 성소에 둘 것이 아니라 그 시신과 함께 진 밖으로 내어가도록 했다. 내어가고 아론과 그 아들들이 머리를 풀고 옷을 찢고 슬퍼하며 그들 또한 죽게 될 것이다. 시신은 가까운 친족이 치우고 아론이나 나머지 아들들은 슬퍼해서는 안된다. 제사장의 죽음은 여호와의 진노가 온 백성에게 미치는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슬픔을 표현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죽일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온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에 빠지는 것이다. 왜 그들은 백성의 대표자이니까.

제사장의 형제인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께서 제사장을 치신 일로 슬퍼할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혈족인데도 슬퍼하면 안되고 온 이스라엘이 자기 대표자가 죽은 일에 대해서 슬퍼할 것이다. 그러면 왜 제사장은 슬퍼해서는 안되는가? 하나님이 그를 죽였으니까 울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니까 하나님의 옳은 것을 시인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화나서 죽이고 그런 말이 아니고 그들은 성소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슬퍼하거나 죽음을 만져서는 안된다. 백성들은 성소밖에 있으니까 슬퍼하고 장사를 지내는 것이다.

제사장은 여호와의 관유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죽음을 면한다. 여기서는 강조를 죽은 다는 말을 두 번 강조하는데 슬퍼하면 죽을 것이고 회막문 밖으로 나가면 죽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슬퍼하는 것이나 회막문에 문에서 나가는 것이나 실은 같은 개념이다. 왜 두 경우에 죽이니까. 그러니까 회막문에 거하라 그 말이나 슬퍼하지 말라 그 말이나 같은 개념이다. 즉 여호와의 관유가 그에게 있기 때문에 즉 생명의 기름 부음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그는 죽음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죽음에 접촉하도록 밖에 나가지를 말아라 그런 것이다. 제사장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어떤 죽음에도 슬퍼하거나 성소에서 나가서 죽음에 접촉하면 안된다. 그들이 죽음과 관계하면 생명되신 여호와의 성소를 죽음으로 더럽히는 것이며 그들이 대표하는 온 백성이 죽음 곧 여호와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된다.

21장10절부터 보면 자기 형제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 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 때문에 제사장은 나가지 말고 슬퍼하지 말아라. 두 경우다 죽으리라. 그들이 죽으면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단위에 있는 모든 것을 사르셨다. 그런데도 만일에 그 단을 하나님을 봉사하는 거룩한 처소로 그렇게 인증하셨는데도 만일에 거기에 나오기를 두려워하고 그럴 것 같으면 그것은 그들 중에 임하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불로는 하나님 앞에 향을 사를수가 없는 것이다.
제사장은 회막에 들어갈 때 술을 금하여 사망을 면하라 8-11절까지 그런 명령이 있다. 그리하여 제사장이 거룩하고 속된 것과 정하고 부정한 것을 분별하며 여호와의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칠 것이다. 술을 금하신 이유는 나답과 아비후 가 술을 먹고 실수하여 죽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사직 수행을 위해서 규례로 주신 것이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해서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며 또한 모세의 규례를 맡아서 백성을 가르치어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백성으로 살도록 한다.

이러한 직무 수행을 위해서 제사장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 술을 금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순리에 맞다. 술을 먹었다고 해석이 가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금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까 그 속죄제도 있고 그 전제를 부어 드리니까 먹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서 먹으라 하는 말은 12절 뒤에부터 나오고 있거든요? 취임식에서 먹으라는 말은 그러니까 그 앞에 먹었을 것이다 하고 해석하는 것은 여기 본문 문맥에서는 안 맞다. 그러니까 술취해서 다른 불로 우리 아버지도 했으니까 나도 해보자 해서 멋모르고 하다가 죽었다 이런 개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단위에 제물을 불로 살랐거든요. 이 불이 제사장을 불살랐다. 왜 그가 그 단위에 불로 나오지를 안했거든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에다가 자기 이름을 두시고 단에다가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고 자기 백성을 복주셨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만나는 장소고 이것 외에 달리 만나는 자리가 없다. 그런데 불로 나타나 소멸하는 불로 나타나 사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어떻든 제사장이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었다.

그에 대해서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문 밖으로 나가지를 말아라. 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아무리 혈족이 죽었다고 해도 그 죽음까지라도 제사장에게 있는 관유를 더럽히지 안고 하나님의 성소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더럽힐 수 없도록 그렇게 한 것이다.
만일에 제사장에게 죽음이 접촉되면 그것은 그 자신이 죽을 뿐만 아니라 그 백성이 죽는 것이다. 왜 죽음이 접촉되었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죽음으로부터 떨어진 거룩함이 있어야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슬퍼하지 말고 나가지 말라 그렇게 말하고 그 다음 그들이 이 정결하고 부정하고 또 의롭고 불의한 이 모든 문제로 백성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가르치는 문제는 11장 이하에 나온다. 정하고 부정한 것 그리고 거룩하고 속된 것 이런 문제들이 11장 음식물의 정결법부터 나온다. 가르치는 직무 수행을 위해서 성소에 들어올 때는 그렇게 하지를 말아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것들 때문에 엡5장에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과 대비된 방식으로 술취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는 것같다. 여기서는 어떤 종교적인 것보다는 직무 수행을 위한 경성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취임식의 제물을 먹으라고 모세가 이야기를 했다. 지금 사람이 죽었는데 제물을 먹으라고 그랬다. 성소에 속한 제사장은 죽음을 슬퍼하거나 접촉하면 안되며 여호와의 단으로부터 주신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만일에 이 양식을 먹는 친교가 없으면 바른 교제가 아니고 친교가 아니다. 여호와께 드린 소제물중 남은 것을 지극히 거룩한 양식으로 누룩 없이 단 곁에서 먹으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누룩 없이 단 곁에서 먹으라 했을 때 누룩없이라는 말을 획일화 시키지 말고 문맥에서 해석을 하라 그 말이다. 이렇게 했을 때 여기서 누룩없이 단 곁에서 먹으라 그 말은 지극히 거룩한 양식으로 단 곁에서 먹으라 했을 때 그냥 회막 문에서 먹으라 그런 말도 아니고 단 곁에서 먹으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여기서 누룩없다는 말은 특별히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양식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이 문맥에서는 맞다. 아직 누룩섞은 안식을 주지 안았다는 그런 제한적인 의미보다는 단 곁에서 먹는다는 즉 하나님께 속한다는 양식 자체로만 이해하는 것이 훨씬 순리에 맞다 그런 말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드린 화목제의 가슴과 뒷다리도 제사장과 그 아들들의 거룩한 양식으로 주셨다. 제사장이 드린 그런 소제만 지극히 거룩한 양식으로 단 곁에서 먹는 누룩 없는 양식으로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손이 하나님 앞에 드린 화목제 그 화목제의 가슴과 뒷다리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단에 드린다. 하나님의 단에 드린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을 제사장과 그 아들들의 거룩한 양식으로 주셨다. 그러니 먹어라. 취임식 축제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취임식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백성이 드린 화목 제물을 먹기 때문에 백성의 대표로도 먹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속죄제 고기를 찾아보니까 불사르고 없다. 그래서 모세가 노했다. 성소에 피를 뿌리지 않는 속죄제의 고기는 백성의 죄를 담당하여 속하려고 세우신 제사장에게 지극히 거룩한 양식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지 않고 태워 버렸다. 제사장이 직무는 백성의 죄를 속하려고 세우신 자다. 죄를 속한다 그 말은 제사장이 어떻게 백성의 죄를 용서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백성을 대신해서 예물을 드림으로 죄를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신해서 예물을 드리는 자가 그 속죄제 예물을 먹는다. 아직 그 예물을 드린 당사자는 화목제처럼 먹지 못한다. 그래도 그것을 대신 담당하는 제사장은 먹는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속하셨다는 확증이 속죄 제물을 제사장이 먹는 일에서 확증되는 것이다. 그런데 속죄제의 고기를 먹지 못하고 불태워 버렸다.

아론이 그에 대해서 대답을 했는데 오늘 그들이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죽었거든 오늘 내가 여호와의 고기를 먹었으면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 셨겠는가? 그렇게 모세에게 말하니까 아론의 말을 좋게 여겼다. 그 말이 옳다. 시인했다 그 말이다. 제사장이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고도 범한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 그는 이미 자기를 위해서 속죄제를 드렸다. 그리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것이다. 속죄제를 드리지 못하면 성소에서 봉사하지 못한다. 제사장이 자기 죄를 위해서 속죄제를 드리고 성소에서 봉사하다가 죽었다. 그러니 제사장이 여호와의 진노로 죽은 날에 속죄 제물을 먹었을 수 없다고 아론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모세로 말미암아 명하신 예물을 온전한 속제가 아니다. 모세도 그것을 신인했다.

왜냐하면 그 속죄제가 죄를 완전히 속했으면 성소에서 죽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다른 불로 예배하다가 죽었거든요. 자 제사장이 자기 속죄제를 드리고도 자기가 죽었다. 임자가 속죄제물을 내면 제사장이 드리고 임자는 아직 못먹는다. 그래도 제사장은 대신해서 먹을 수 있는데 제사장이 자기 직무 수행을 우해서 자기를 위한 속죄제물을 드리고도 죽었다. 그러면 이 속죄제가 그 죄를 온전히 속했다는 말인가? 못했다는말인가? 속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속죄제물을 먹을수가 있느냐? 그러니까 모세가 그것을 옳게 시인했다 그 말이다. 그것은 왜 그러냐면 지금 실제적인 사건에서 제사장이 죽었기 때문에 그것은 구 재물이 말하자면 제사장이 죽었는데 그 제물을 대 제사장이 먹고 왜냐하면 그것을 드린자가 속함을 받지 못햇는데 그것을 대표하는 자가 먹을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속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 취임식에서 나타난 일은 백성을 대신해서 제사 지내고 자기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서 하나님 이 그 제물을 받으셨다. 제사장이 축복해서 제사 의식을 끝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하나님이 제사장과 함께 나와서 백성을 만나신 것처럼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단위에 제물을 다 불살랐다. 하나님이 드디어 단위에 나타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건데 제사장이 겁나서 그랬는지 그 단에서 다른 불로 나가다가 죽었다. 그랬을 때 다른 제사장들은 전혀 슬퍼해서는 안된다. 왜 제사장은 생명 되신 하나님과 친교에도 부르셨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죽음에 관계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죄하고 관계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이기 때문에 제사장은 자기 영광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제사장은 이 거룩으로 백성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항상 경성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 죽은 이 잔치에서 제물을 먹어라. 아직 먹는 식이 남아 있거든요? 하나님 앞에 제사가 끝나고 이 사건이 벌어졌다. 그 다음에 이제 먹을 순서가 남았다. 그런데 먹을 것은 다 있다. 나중에 보니까 속죄제물만 없다. 그것을 태워버렸는데 화를 냈다. 왜 태워버렸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죽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이 속죄제물 먹지 않는 사람도 먹지 않고 태워버렸으니까 죽어야 되겠지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룩한 예배는 한 가지만 잘못해도 다 죽고 먹는 것은 대총먹어도 되니까 안죽고 그런 것이아니라 법규대로만 적용하자면 죽어야 된다.그런데 먹지 못한 것을 모세가 인정해 주었다. 왜 제사장이 자기를 위해서 속죄제를 지내고도 그 범법함을 인해서 죽었거든 그 당사자가 죽었거든 우리가 그 제물을 지금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했을 때 모세가 그것을 옳다고 시인해줬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제사장도 온전히 다 먹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자기를 위해서 속죄 제물을 드리고도 그 다음 그가 성소안에서 범한 죄 때문에 죽어버렸으면 그가 드린 속죄제물은 그를 성소에 사는 전체적인 거룩함을 주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심판 때문에 아론이 먹지를 안&54776;다. 왜 먹는 것은 생명의 고제로 주는 것인데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 먹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했을 때 너는 믿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시인했다 그 말이다.

이제 신약과 비교하면 잘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는 친히 자기의 몸을 속죄제의 피로 드린 자기의 피와 살에 참여하여 먹고 마심으로 하늘에 속한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 우리는 아론의 아들들이 죽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대 제사장이 죽었다. 그날에 제자들은 너무 겁나서 금식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 때문에 신랑이 영원히 함께 하시니까 금식할 필요가 없다. 그는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몸으로 오셨으니까. 이것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대 제사장까지라도 자기 아들 제사장이 죽었을 때 그 속죄 제물을 먹을수가 없었다. 심판이 집행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예수는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죽음을 짊어지셨는데도 그의 상에 모인 백성들은 그 죽음 때문에 불안하고 공포심에 떨고 먹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죽으심안에서 하늘에 속한 영원한 교제를 즐거워할 수가 있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누리는 것이다.그러니까 구약 교회는 그 속죄하는 제사가 온전치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신약에서는 그 속죄 제물이 완전해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아직도 죄 문제 때문에 심판이 집행되는 것처럼 그런 두려움에 떨고 그럴 필요가 없다. 그것이 첫 제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확증이었다. 이것을 그전에 적용할 때는 신약 교회에 아나니아 삽비라 그쪽에다가 가끔 연결을 시켰거든요! 그것이 여러분에게 굉장히 흠미가 있었는가 몰라도 자세히 보면 유형론 때문에 그런다. 죽었다는 똑 같은 사건을 비교해 버리니까 죽었다는 사건으로 거꾸로 해석을 해 들어가니까 그런다. 잘못된 해석이다. 잘못된 인용이다 그 말이다.

문맥을 따라서 죽음을 해석해야 되지 죽었다는 사건이 같다고 해서 거구로 해석해서 맞추면 안 맞는 것이다. 그것이 유형론 해석에서 맹점이다. 그러지 말고 이 문맥에서 죽음의 의미를 해석했을 때 신약 교회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죽음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왜 그렇게 해석을 했냐면 죽음을 통해서 성화 시켰다. 너희 조심해라. 내가 여기 있다는 법리적으로만 자꾸 풀었거든요. 하나님을 그런 속성적인 문제로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중에 함께 거하시고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는 분으로 임하셨지 재판장으로 임하신 것이 아니었다. 복주시는 분으로 임하신 분이 소멸하는 불로 임하셨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셨다. 단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없다. 처음부터 출애굽기 20장의 단은 여호와께서 친히 강림하셔서 복주시는 곳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제사장이 그런 믿음이 없고 그래서 죽었는데 그런 제사장의 친족의 죽음까지리도 제사장들을 더럽히지 못할 것이다. 다른 관계로 친족이 죽으면 친족을 더럽힌다. 왜 그들이 장사를 지내야 하니까. 왜 생명의 기름 부음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제사장의 거룩이다. 이런 극진한 교제에로 부르셨는데도 그 날에 제사장이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지내고도 죽었으니 대 제사장일지라도 그 예물을 먹을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심판이 거기에 나타나 있었거든요. 먹을수가 없었다. 그냥 아들이 죽으니까 슬퍼서 먹지 못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고 기분이 나빠서 먹지 못한 것이아니다. 그 속죄제를 드리고도 죽었거든 제물을 먹는 것을 속제의 완성을 말하고 친교를 말하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먹을수가 있는가? 모세가 옳다고 했다.

분명히 모세가 다 먹으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제사장이 먹지 못했을 때 그것을 옳다고 시인했다 그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 사건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 속죄 제물을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아들을 세우신 이 속죄제물은 아들을 대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아들의 몸을 속죄제물로 드린 이 제사에서는 오히려 아들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하늘의 친교에 참여하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흔적은 없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이 말씀을 읽는 방식이다. 진노의 흔적이 없다. 여러분은 그런 일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온전한 믿음으로 담대히 나와야 한다.

술은 음식이다. 어떤 의미로는 생활을 즐거움이 없어야 거룩하다고 하는 경건주의는 참으로 위험하다. 하나님은 우리는 즐거운 식탁으로 초대하셔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도록 주신 것이고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처럼 즐거운 것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런데 슬퍼해야만 경건한 줄로 아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술을 즐거움의 음식이고 슬픈 자까지라도 슬픔을 잊게 하는 음식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자유를 빙자해서 절제할 수 없으면 또 그 먹는 것이 형제에게 부덕하고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 같으면 당연히 먹지 않아야 된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들이 그것 먹지 않는다고 배고플 것도 아닌데 그것 먹으려고 형제를 상하게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단순히 먹을 자유가 있다 이렇게만 아는 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형제 사랑도 모르는 교만한 자고 그런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절제하는 자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있는 자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누라는 이웃 형제가 아니여요? 우리 둘이니까 먹고 한판 싸워 보고 그렇게 하면 절대로 안된다. 내게 자유가 형제에게 부담이 되면 마땅히 절제해야 한다. 단지 절제하지 못할 바에야 끊어 버려라 하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가 아니다. 절제하지 못할 바에야 끊어버려라 한 것은 세상 식으로 끊어버려라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문제를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 있는 본문하고 지금 말하는 것하고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레위기 10장은 술먹는 이야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이것은 항상 경성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하고 부정한 것 또 거룩하고 속된 것 이것을 분별해서 백성을 가르치리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과 관계된 이야기로 그 말을 한다. 그래야 네가 백성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조심하라 그 말이다.

항상 그 문맥 해석에 관심을 둬야 한다. 아차 하면 유형적으로 돌아가기 쉬운데 문맥 그 문맥에서 의미 그것을 잘 봐야 한다. 이것을 제사장의 취임식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떻게 봐서는 아주 불길한 징조다. 이 불길을 징조는 구약의 전체에 나타나 있는 그림자다. 말하자면 그것이 구약의 속제의 한계다. 온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문제로 불안해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로 먹지 못해서는 안된다. 여러분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 한다. 왜 주의 죽으심은 영원한 완전한 속죄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전한 속죄를 찬양할 찬송이 별로 없다. 그래서 101장을 자주 부른다. 그것은 단순해도 가사가 좋고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슬픔을 고백하는 것만 있어서 별로 큰 찬양을 하기가 난처하다. /김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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