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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 집의 성결법 (레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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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레위기19장이다. 레위기17장부터 그 이하는 소위 레위기의 후반부가 된다. 그런데 17-20장까지는 이스라엘 집에 성결법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특별히 17장은 피는 생명이고 거룩하니까 하나님 단에만 드리고 절대로 먹지 말아라. 피에 대한 규례가 있다. 피는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 백성은 먹지 않도록 했는데 17장의 피에 대한 규례는 이스라엘 집이 생명을 속하는 피를 여호와께만 드려서 피로 말미암아 죄를 속함 받은 생명으로 여호와를 봉사하며 살게 하시는 명령이다.

그 다음 18-20장까지는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언약적 살의 규례가 이어져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들은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족속들을 본받지 말고 그렇게 본받지 말라는데 강조점이 주어진 것이 18장이다. 18장 제일 끝에를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쫓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항상 하나님을 여호와로 말씀해서 언약 체결적인 문구로 말씀하시는데 18장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쫓아냈던 이전 백성들의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본받지 말아라. 하는데가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18장의 여러 죄목들은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기 전에 가나안 백성들의 죄들의 항목들을 나열하는데 강조점이 있다. 그 다음에 19장에서는 여호와의 거룩한 규례를 지켜라 하면서 여호와께서 자기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19장이고 그 다음 20장에는 다시 경고적으로 만일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속속의 가증한 일을 행하면 그들 또한 진노로 죽이실 것이다 하는 관점에서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죽여라. 이 반드시 죽여라 하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있다. 그것이 이스라엘 집에 대한 성결법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사장에 대한 성결법이 21-22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절기와 또 안식에 대한 성결법들이 그 이하에 쭉 이어져 있다. 그리고 제일 끝에는 지키면 복을 주고 안 지키면 벌을 칠 배나 더 하리라. 하는 언약적인 경고가 뒤에 붙어 있고 27장에는 하나님 앞에 십의 일과 초태생을 전체로 헌신해 드리고 무르지 못한다는 온전한 헌신에 대한 서원이 제일 끝에 붙어 있다.
그렇게 말함으로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끝났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레위기는 시내산 성소 중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거하시는 삶을 사시는가? 하는 문제가 레위기의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된 자에게 언약적 삶을 명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말씀이 단의 처음과 끝 또는 중요한 지점에서 반복되며 내용은 종주 언약과 유사하다. 그전에 왕과 백성의 언약 형식 구조로 되어 있다. 나는 여호와인데 너희를 위해서 이러 이러한 일을 행한 분이 아니냐? 애굽에서 건져냈고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셨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명하는 이런 것을 지켜라. 너희들이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이러 이러한 벌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니라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19장이다. 레위기19장은 전체적인 개념인데 출애굽기20장부터 23장에서 언약의 모법인 십계명에 이어서 명하신 시행령과 상응한다. 여기 이러 이러한 규례를 쭉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디에 병행 구절이 있냐면 출애굽기20-23장과 비교해 보라 그 말이다. 그와 비슷하다. 출애굽기는 하나님 나라로 조직하는 규례가 강조점이고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교제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비슷한 점은 먼저 모법인 십계명을 말씀하고 이어서 시행령을 말씀했는데 여기 19장은 시행령과 상응한다. 그래도 출애굽기의 시행령과 레위기의 시행령의 차이점은 출애굽기는 하나님 나라 조직과 관계가 있다. 나는 어떻게 너희 하나님이 되는가? 너희들은 어떤 관계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의 구성원이 될 것인가? 하는 강조점이고 레위기는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니 너희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서 함께 하는 나라를 드러내라 하는데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 말이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십계명 모법을 말씀하시고 나서 시행령을 말씀할 때 나에게 단을 쌓으려면 토단을 쌓아라 내가 그 단에 임해서 복을 주리라.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단에 임하신다. 그리고 히브리 종에 대한 규례를 말씀한다. 종은 칠 년만에 해방시키고 어떻게 어떻게 해라. 하는 말씀이 나와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조직 내가 어떻게 너희중에 임해서 함께 하는 하나님으로서 단에 임할것이니까 너희들은 어떤 구성원으로 함께 하실것인가 해서 히브리 종에 대한 규례가 앞서고 있다.

그런데 레위기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성소에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거룩한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 집에 들어가서 단에다 드리고 어떻게 모든 먹고 마심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 성소에 속한 백성으로 거룩하게 할 것인가? 거기다가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 처음 시작에서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문제가 강조되어 있지 하나님께 단을 쌓으면 내가 거기 임하리라.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이 토단에 임하리라 하는 체결적인 구조 보다는 너희들이 나한테 예물을 드릴려면 이러이러한 예물을 드려라. 레위기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했다 여기서도 나한테 헛것을 위하지 말고 나를 위하고 또 나한테 화목제물을 드리고 이렇게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문제로 시작이 되고 있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비슷한 구절들이 출애굽기에서 반복된다고 해서 그대로 종합시키면 안되고 차이점들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2절은 주제적인 서론이다. 여기 보면 너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것이 주제적인 서론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계속 말씀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 규례를 따라 살므로 거룩하게 되라는 요구다. 이 거룩을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됨 그런 문제보다도 그들 중에 계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거룩이다. 하나님이 모세 제도 안에 임했으면 모세 제도를 따라 사는 것이 거룩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임했으면 그 빛가운데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거룩이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로 살면 윤리고 어른은 어른으로 살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항상 그 구원 역사적인 시점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함이니라. 그들 중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가 그 백성에게 그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거룩한 규례다. 왜냐하면 교제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불러 냈다. 내가 성소에 너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아니냐? 그러니 너희들은 이제 가나안 백성들처럼 우상에 속한 백성이 되지 말고 너희들은 내 말을 잘들어서 나를 누리고 나를 나타내라 그런 말이 거룩한 규례다 그런 말이다.

이어서 3-10절까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11-18절까지는 그 공동체의 규례가 기록이 되어 있고 그리고 19-31절은 그것을 더 확대 해석해서 모든 삶에서 구별의 규례를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제일 끝에는 다시 결론으로 강조를 하는데 너희는 나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해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렇게 해서 마무리가 되어 있다.

먼저 3-10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규례에 대해서 보겠다. 3절에 보니까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고 우상의 신상을 만들지 말아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 말이 반복되어 있다. 그리고 5절에 보니까 화목제 희생을 드릴 때는 열납되도록 드리고 또 그것을 먹으려면 7절에 열납되도록 먹어라. 만일에 열납되지 못하도록 먹으면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여기 보니까 부모를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 화목제을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도록 먹고 그 다음 9절을 보니까 곡물을 벨 때 밭 모퉁이까지 거두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 떨어진 것을 타국인과 가난한 자를 위해서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1절부터 보니까 그런 문제보다도 도둑질하지 말고 또 이웃을 압제하지 말고 이런 말이 쭉 나와 있다. 그러니까 내용상 보면 10절까지가 11절 이하의 내용하고 좀 다르다.
10절까지는 주로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 단에 화목제를 드리고 또 하나님의 화목제를 열납되도록 거룩하게 먹고 그리고 자기만 먹는 것이 아니라 밭 모퉁이 이삭을 가지고 가난한 자와 고아도 먹을 수 있도록 풍성히 주고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교제가 10절까지 강조되어 있다.

11절 이하는 그런 문제보다도 다른 문제들을 말씀하고 있다. 3-10의 주보를 읽겠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부모를 공경하며 안식일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서 식물을 드리고 그 상에서 먹으며 가난한 자와 타국인과 함께 하나님이 베푸신 풍성함을 나누라 하는 말이 3-10절까지 요약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에서는 단을 쌓아라 내가 그 단에 임하리라. 시내 산에 강림하신 구조를 단에 임하리라 그렇게 말하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 히브리 종이 어떻게 하는 자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쭉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구체적인 율례들을 쭉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행령들을 말씀한다. 그런데 레위기는 언약 공동체의 삶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단에 임하리라 하는 말보다도 부모 말을 잘듣고 안식일에 나를 즐거워 해라 왜냐하면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부모 말을 잘 듣고 그리고 안식일에 나를 즐거워 해라 그 말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내 앞에 화목제를 드리라. 그리고 그 화목제을 거룩하게 먹어라. 열납되도록 먹어라. 화목제는 너희들만 먹을것이 아니다. 실은 화목제는 임자도 먹고 다른 사람도 먹을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확대시켜서 수확 때 이야기를 한다. 밭 모퉁이를 베지 말아라. 또 돌아서서 이삭을 줍지 말아라. 그래서 고아나 객이나 그리고 가난한 자가 먹도록 해라. 그렇게 해서 풍성한 교제의 삶이 강조가 되어 있다.

이렇게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상에서 교제할 뿐만 아니라 가나안 자와 교제한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화목제로 드린다. 그런 교제의 삶이다. 주로 안실일에 교제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부모가 대리자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고 내 안식일을 공경해라. 그리고 화목제을 나에게 열납되도록 드리고 그리고 아무리 화목제물이어도 열납 되도록 먹어라. 그것을 다른 식품으로 먹어 버리면 부정하니까 쫓겨 날 것이다. 내 상에서 기쁘게 먹어라. 그리고 네 밭의 포두나무나 모든 열매까지라도 너도 먹고 고아나 객도 먹도록 해라. 그렇게 해서 풍성한 교제의 삶에다 강조를 주어져 있다.

3-4절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 나의 안식일을 지켜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헛것을 위하거나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열납되도록 먹어라. 제 3일에 먹어 성물을 더럽히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 지리라. 아무리 화목제물이어서 3일 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틀까지다. 구약의 안식일의 양식은 이틀이고 화목제도 이틀이다.

모퉁이까지 수확하지 말고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해서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이것을 거의 요약해서 다시 반복해서 적어 놨다. 성경을 다시 강론하려고 읽어보면 성경 기록된 방식으로 읽는 것이 최고다. 단지 여러분에게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성경은 하나님이 이렇게 기록한 것이 제일 알기 좋다고 해석을 해 주셨는데 나는 이것이 어렵다고 바꿔 버리면 실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강론하고 요약해서 읽어보면 읽어 볼수록 딱 이식으로 기록해야 제일 효과 있게 묘사해 준다.

그러면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는 말을 우리 식으로 하면 다 빼 버리고 뒤에다 한 번 넣어도 되는데 여기는 군대 군대 중요한 분기점에서 반복해서 넣고 있다. 그러니까 성경 자체를 읽으라 그 말이다. 단지 저는 도움이 되도록 하는 길잡이 일 뿐이지 이것을 길잡이로 삼아서 다시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설명한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면 성경 본문이 얼마큼 우리에게 효과 있게 그것을 묘사해 주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에다 요약을 실고 뒤에다 거의 그것을 줄여서 반복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11-18절까지는 이제 좀 성격이 다르다. 교제에 대한 규례 문제 보다는 여기 보니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 이런 재판할 때 이런 저런 공동체 규례가 주로 강조가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시는 공동체의 규례인데 전부 내용을 보면 공의와 사랑의 규례다.
내용을 전체로 요약하면 서로 진실하고 가난한 자와 장애자를 압제하지 말고 공의로 재판하며 이웃을 죽이려고 하지 말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내용으로 요약되어 있다. 요약해서 읽어보니까 한마디로 공동체의 사랑의 규례 그 사랑은 공의까지 포함한 사랑의 규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읽어보면 11-12절을 보면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을 말고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여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는 한마디로 도적질하지 말고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그 말이다. 가장 큰 거짓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다. 왜 나는 여호와이기 때문에 이 여호와는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서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고 나는 너희 중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냐?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이렇게 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는 서로 진실 하라는 문제다. 자 그 다음을 보면 13-14을 보면 이웃을 압제하지 말고 빼앗지 말고 품꾼의 삯을 그날에 주면 그런데 성경의 표현을 그렇게 안되어 있다. 성경은 아주 표현이 좋다. 나는 그냥 글자를 줄일려고 하니까 그날에 주며 그랬는데 성경은 13절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그러면 품꾼을 밤새도록 기다렸겠지요? 왜 하루 일당을 받아야 되겠는데 그러니까 이 표현법을 봐서는 나간이 쓰면 성경의 묘미를 다 없애 버린 것이다. 그냥 일당은 그 날에 주어라. 이렇게 하면 거래 문제만 되는데 여기서는 왜 가난한자의 품속에 있어야 할 삯을 네 품속에 두고 가난한 자가 밤새껏 애타게 너는 품속에 품고 아침까지 편안히 잠을 자냐? 그렇게 하지 말아라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표현된 데로 읽는 것이 제일 좋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지혜롭지 못하지요? 그런데 묘하게 사람이 설명하면 쉽고 성경을 직접 읽으면 어렵다는 말인지 우리가 잘못된 것이다. 하여튼 부지런히 읽고 알아야 할 것이다. 품꾼의 삯을 그 날에 주며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며 우리 같으면 줄일려면 이렇게 하지 말고 뭐라할까요? 장애자를 괴롭히지 말고 그럴까요 그런데 여기서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이런 표현법이 얼마나 좋은가? 귀 먹은 자 앞에다가 장애물을 놓아봤자 눈 뜨고 있으니까 건너가 버리겠지요? 그런데 이제 저주하면 못듣는다.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고 내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더구나 이런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꼭 나온다. 다른 데서는 노인 앞에서 일어나라 거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 말이 붙어 있다. 왜 이렇게 여기서는 약한자 앞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 이런 사람을 저주하거나 장애물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거기다만 이 말이 붙어있다. 다른데는 이 말이 안붙어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빼 놓을 수가 업다.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는 보니까 11-12절은 서로 진실 하라는 말이고 13-14절은 가난한 자에 대해서 압제하지 말라는 말이다. 15-16절을 보면 재판 때 불의를 행치 말며 빈부를 가리지 말고 공의로 재판하며 성경은 더 풀어서 설명을 한다. 부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동정하지 말고 이런 저런 말이 있겠지요? 빈부를 가리지 말고 공의로 재판하며 돌아다니며 논단하지 말며 돌아 다니면서 사람을 자꾸 평가하는 것이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재판과 관계된 문제다. 두루 돌아나니면서 말로 재판하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논단하지 말고 재판을 할지라도 그를 죽일려고 하지 말아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해야지 죽일려고 하지 말아라.

여기서는 전부 재판과 관계된 공의로운 문제다. 17-18절은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하지 않도록 그를 책선 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는 사랑에 대한 말이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하지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망해 줘라. 그리고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해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이웃 사랑에 대한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강령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는 형제 사랑에 대한 문제로 공동체의 규례를 마무리 짓고 있다. 그런데 요는 문제는 단어는 똑 같아도 형제 사랑이라는 말이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과 주님께서 율법의 강령이니라 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했을 때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 똑 같아서 똑 같은 것이 아니라 모세 제도 때는 가령 네 원수를 갚지 말고 해도 잘못하면 재판에 맡기는 것이다. 자기가 용서하면 안되니까. 누가 나한테 잘못했는데 용서해야지 하면 안되고 반드시 율법은 맡은 자들의 판단을 받아서 속제제물을 내든지 보상을 하던지 해야지 우리끼리만 알고 봐주지 이런 식으로 용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해도 적군이 쳐들어오면 싸워야 되는 것이지 또 적군은 열심히 싸워야 되고 성전에 들어오면 막아야 되는 것이지 사랑하라 했으니 성전에 들어오게 하면 큰일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도 모세 제도를 시행함으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한 것이지 모세 제도를 넘어선 사랑은 없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 도안에서는 그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강령이라 했을 때 까지라도 강령의 의미는 이제는 신약 교회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계명이 채워지는 것이지 모세 제도를 확대해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런 것을 꼭 구별을 해야 한다. 구원 역사에서 말씀하던 시대 어린 아이한테 너 사람되라 장가간 아들한체 사람되라 전혀 내용이 다르다. 어렸을 때 내가 숙제 잘하니까 이뻐하더라 심부름 잘하니까 이뻐하고 아버지 오늘 숙제좀 내 주시오 내가 사람될라요 그러면 안된다. 전혀 안된다. 어른 됐다는 새로운 관계로 다시 해석이 되어야지 어렸을 때 사람되라고 하면서 규례를 주었다. 몇시까지 들어오고 씻고 이렇게 하라 했더니 이뻐하시더라 그러면 커서는 어떻게 할까 발만 닦을 것이 아니라 샤워까지 하면 더 이뻐하시겠구나.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구약을 확대해서 신약으로 오면 안되고 구약은 구약이라는 관계에서 윤리고 신약은 신약은 아들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중에 오셨다는 관계에서 새로운 윤리다. 그러니까 그것을 확대해석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해석을 해야한다. 말은 똑 같다.

여기서는 전부 사랑에 대한 규례가 강조되어 있다. 그러니까 앞에 요약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진실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공의로으 판단을 하고 그리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 이처럼 언약 공동체를 서로 진실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집행하고 그리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규례가 여기 있는 규례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것하고 성격이 좀 다르다. 앞에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밭의 모퉁이것을 거두지 말라 했을 때라도 분명히 객과 고아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그 사랑의 의미가 그저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에서 누구를 압제하냐 그런 문제보다는 어떻게 함께 나누는가? 하나님의 화목제물을 상에 먹는 것처럼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들판의 곡식을 함께 나누는가? 하는 그런 나눔 사랑의 교제가 강조고 11-18절을 그런 강조점은 아니다. 그러니까 차이점이 나니까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좋다.

그 다음19-31절은 그런 삶이 더욱 확대되어 있는데 모든 일에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와 구별을 지키라. 과실도 제 4년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고 오년에 먹어라. 피채 먹지 말고 이방의 풍속을 본받지 말고 여호와만 섬겨라. 그들이 이처럼 여호와의 공동체로서 여호와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 앞에서 교제하고 서로를 진실하게 보살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런 삶은 그들의 전 삶의 구조에까지 확대되어야 하고 이방인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될 것이다. 하는 문제가 여기 있는 문제다. 그러니까 19-22절을 보면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니라 다시 말하고 있다. 그전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내 규례를 지킬지니라 하니까 분명히 형식상에도 구별이 주어져 있고 그리고 그의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데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하지 말고 두 종류의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고 두 제료로 직제한 옷을 입지 말며 해방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과 행음하지 말라. 그러니까 한다미로 하면 섞으지 말라 그 말이다. 그것이 19-22절에 섞으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은 농대 다니는 사람이 호박하고 오이하고 접붙여서 뭐 하지 말라 그 말이 아니다. 이것을 과학 책으로 읽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래서 과학의 한계점 하나님이 주신 각 종류대로만 하지 혼종을 만들면 안된다. 그것은 과학이 경계를 넘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할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여기서는 특별한 도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구별의 삶을 살라고 하면서 그런 규례를 주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옷도 혼방 옷을 입으면 안되고 또 곡식도 두 종자를 한 밭에 뿌리면 안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신 질서를 따라서 모든 삶에 있어서 구별된 질서를 따라서 살아라 그런 말이다. 그리고 여기 더 보면 해방되지 못한 씨종과 행음하지 말아라. 만일에 그 종이 아직 해방은 안됐는데 다른 사람과 혼인했으면 주인이라도 그 종을 건드리면 둘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이기 때문에 죽지를 않는다. 그러나 속건제물을 드리고 속죄해야 할 것이다. 그 주인하고 종하고도 섞으면 안된다. 왜 그 종이 이미 정혼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아내로 취할 수 없다. 만일에 이 종이 정혼을 하지 안했으면 그는 자기 아내로 취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주인과 종도 한마디로 섞으면 안된다. 그런 말이다. 한마디로 섞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24-25절은 과목을 심으면 3년 동안은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그리고 먹지 말고 그리고 제 4년에는 모든 것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려 찬송할것이고 5년에는 먹으면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니라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 그러니까 곡식을 먹을 때까지라도 3년 까지는 아직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라. 그리고 제 4년에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려라. 그리고 5년에는 먹으라. 그래야 가나안 땅에 곡식이 풍성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나안 땅에 풍성한 것을 거둘 때 까지라도 먼저 하나님앞에 드려야 되고 후에 먹어야되고 하나님앞에 드리기 전까지는 아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어서 드릴수가 없다. 그런 의미로 먹을수가 없다. 그러니까 과목을 거둘 때 까지라도 그런 방식으로 거둬서 먼저 하나님께 드려라. 드리기 전에는 아직 거룩한 것이 아니다. 드린 후에 네가 먹음으로 거룩하게 먹어라. 그래야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그 과목이 풍성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26-28절을 보면 모든 것을 피있는채 먹지 말고 복수를 하지 말고 또 이방의 풍속을 본받지 말아라. 한마디로 요약을 해 버렸다. 26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수를 하지 말고 술수를 행하지 말고 머리가를 둥글게 깍지 말고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고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라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서는 특별히 죽은 자를 애도하는 문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여러 풍속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대표적인 복술하고 점치는 일이다. 우상섬기는 것이다. 이것을 제일 앞에서는 4절을 신상을 만들지 말고 헛것을 위하지 말고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말하면서 그들은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복술을 행해서는 안되고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이런 저런 단장을 해서는 안되고 그리고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죽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면 안되고 그리고 몸에 무늬를 놓지 말아라. 이것은 그 당시 하나님이 쫓아내신 가나안 땅의 풍속들이다. 그렇게 구별을 말씀하고 있다. 그 다음 29절을 보면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하지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 보니까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하고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 성소를 공경하라는 말하고 같이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하나님이 쫓아내신 가나안 땅 백성들은 성소의 음행이 성행했었다. 왜냐하면 생산의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많이 음행을 했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고 성소를 공경하라 하는 문제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딸을 기생 만드는 문제하고 연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성전 창기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말이다. 그냥 단순한 음행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음행으로 온 땅이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31절에 너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고 추종하지 말라 나는 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특별히 여기서 26절에 말씀했던 그 말씀을 거의 한 번 다시 반복하면서 더럽히지 말라고 반복하고 있다. 그러니까 26절-31절까지는 실은 이방 풍속과 전부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26하고 31절은 서로 상응한다. 서론과 결론으로 서로 상응하는 그런 구조다. 이방 풍속과 전부 관계가 있다. 그 다음 32절부터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될 규례들이다. 여기서는 이방 풍속과 관계된 그런 것이 아니다.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을 공경하라. 제일 처음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했다. 여기서는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로 다시 마무리를 짓고 있는 그런 문맥들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 노인은 마땅히 공경할 자이니까. 권위가 있다. 노인은 힘이 없으니까 그런 의미하고는 다르다. 아까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 했을 때 그들은 힘이 없으니까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되고 여기는 노인은 마땅히 공경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노인을 마땅히 공경해야 된다. 왜 그들이 한마디로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 급이다. 그래야 그들이 신접한와 박수를 쫓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처음에 서론에 있었던 그런 것과 상응하는 구조로 결론이 진행되고 있다.

32-26절을 보면 센머리 앞에 일어서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타국인이 너희 가운데 함께 있거든 33절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타국인이 되었지 않느냐?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리고 35절에 보면 재판에든지 도량에든지 공의를 행해라. 그러면서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리고 37절에 너희는 나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32-36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질서와 사랑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센 머리앞에서 일어서고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거하는 타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본국인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경외하는 질서는 이전에는 부모를 공경하라 했는데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공경하라 함으로 공경이 더 확대되어 있고 그리고 여기 보니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했는데 여기는 타국인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어 있다. 타국인을 본국인 같이 여기라.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그네가 되었을 때 너희를 애굽에서 건지신 여호와가 아니냐?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신 관계로 이스라엘 백성이 타국인을 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전에 네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를 사랑하며 그런 것이 확대되어 있다. 그리고 공의로운 일을 해라. 재판이든지 도량형이든지 불의를 행치말고 공의롭게 해라.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한 여호와니라. 그렇게 해서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질서 공경하고 교제하고 그리고 그럴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공의로 행하고 그런 문제들을 세가지 규례에서 반복함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우리 같으면 여기 이런 것을 말하지 않고 앞으로 그냥 옮겨 버리면 되겠지요? 그런데 또 뒤에다 부록을 붙이는 것처럼 다시 붙이고 있다. 다시 보면 단순한 부록이 아니라 이전에 것을 더 확대하고 강화시키는 의미로 반복되어 있다. 이제는 부모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센머리 앞에 일어서야 된다. 이웃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인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된다. 그리고 이제는 재판 뿐만 아니라 모든 도량형에 까지 공의를 행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전체를 묶는 방식으로 결론이 되어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라 내가 여호와니라.왜냐하면 그들은 이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세상을 닮지 않고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사 하늘에 속한 생명의 교제를 그의 교회에 주셨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그의 몸과 지체로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따라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하며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신약 구절들을 읽어보면 좋겠지요?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 중에 성소를 짓고 함께 하셨다. 그리고 레위기는 그 성소에 들어오게 하셔서 예물을 드리게 하시고 그 상에서먹고 즐거워 하게 하셨다. 그럴 뿐만 아니라 레위기를 보면 그들의 절기며 모든 땅이며 여호와의 성소적인 구조로 전부 거룩하게 했다. 이제는 레위기 제일 끝에 보면 초태생이고 십일조고 모든 것을 하나님앞에 드려진 것으로 되어 있고 무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전체가 헌신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애 강림하셔서 그들과 언약 체결하신 삶이다. 이 은혜으 일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질서로 완성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가 하늘 성소에 속한다. 이제는 하늘 성소에 속한 백성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처럼 행하라 했는데 우리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한 영으로 한 몸을 이루셨다. 그런 관계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런 관계로 우리들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고 그런 관계로 몸을 이루는 사랑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여기 인용된 구절들 벧전1장이나 엡5:1절 이하에서 나오는 말씀들이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옛날에 주신 이런 말씀이 왜 신약 교회의 말씀이 되는가? 그냥 이것을 그대로 우리한테 연결을 해서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안되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관계에서 다시 이것을 읽어야 한다. 그랬을 때만 어렸을 때의 그림자는 다 벗겨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새 계명의 윤리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것이 신약에서 적용하는 윤리다.
신약에서 새로운 십계명을 선언하지를 않는다. 특별히 마5장에서 그렇게 나타나 있다. 새롭게 선언한 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했을 때 그것을 새로운 관계에서 윤리다.

지금은 신상을 만들지 말고 하는 그런 우상 숭배 정도가 아니다. 그전에는 우상 안 만들고 성소에 가면 되는데 지금은 그런 것 안 만들었으니까 우상 안 섬기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 도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겨야 된다. 그리스도를 빼놓고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모든 것은 잘못하면 다 우상이된다. 더욱 확대되고 깊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우리 집에서 우상 안 만들고 그런 정도로 우상을 안섬기고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약은 세상을 사랑하면 간음하는 여인같다. 음행한 여인이라고 막 묘사를 해버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늘에 속한 질서가 왔기 때문에 세상에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된다. 전혀 세로운 관계로 윤리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따라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를 가르치고 반드시 책선하라 했거든요? 서로를 가르쳐야 되고 그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앞에 화목제로 드려야 되고 또 내가 부지런히 수고해서 형제를 먹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밭모퉁이를 베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랍비들은 몇%를 정한 것이다. 밭에 모퉁이라 해서 한 뼘이나 떼어놓으면 안되겠지요? 그래도 한평쯤 뗀다거나 해서 랍비들이 다 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것은 안정한다. 모퉁이뿐만 아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몸을 주신 것으로 사랑의 봉사를 해야 한다. 구약 백성은 그렇게 하지 않고 모퉁이만 나 두면 된다. 만일에 잘만 베면 이삭 안 떨어져도 된다. 다시 돌아가서 안 주우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삭이 아니다. 요새 같으면 이삭 떨어뜨려 놓고 주어 먹으라고 그러면 기분 나쁘다. 그러면 안된다. 그것이 아니다. 지금은 자기가 부지런히 수고해서 고린도후서8-9장이 그것이다. 주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었지 않냐? 그러니까 너희들도 너희에게 있는 것으로 형제를 공급해라.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일에 참여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을 말하기를 내가 형제를 위해서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내가 제물만 소비 한 것이 아니라 내 몸까지 소비하겠다. 왜 주님께서 몸을 주셔서 너희들을 봉사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 윤리를 기독론적인 방식으로 다시 해석을 하는 것이 신약의 윤리지 그냥 이것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 실은 그렇다. 우리가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큰 아들한테 몇%로 둘째 아들 몇%로 다 정해둔다. 그리고 큰 아들 것 자기가 다 써먹고 없고 너는 네것 먹었으니까 끝이고 그러면 둘째 아들 그렇게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내 누후 대책 이것은 절대 손대면 안되 이런 식으로 사는 부모가 없다. 만일에 큰 아들이 망해버리면 둘째 아들 줄 몫이 없다. 먼저 굶은 아들이 먼저 바쁘니까 먼저 줘야되고 둘째 아들은 그 다음 볼일이다. 이젠 둘째 아들이 크서 안뒤로 큰 싸움 날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한테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당장 큰 아들이 굶으니까. 그 다음 내 노후 대책도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이것 다 주었다가는 나는 끝나겠구나 그렇게 안된다. 왜냐하면 하면 몇분의 몇으로 봉사를 안한다. 회사가 같으면 몇분의 몇 하면 끝이다. 국가도 망해도 세금 내면 끝이고 더 낼것이 없다.

그런데 가족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교회를 섬기는 방식이다. 그런데 구약에는 이런 규례로 되어 있다. 신약 때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관계에서 서로를 해석하고 봉사해 줘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는 몇 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아니니까 이번 성탄절에는 내가 만원만 내면 우리 집사님들 가정이 한 20가정되니까 한 20만원 구제금이 되겠구나. 올 성탄절 때는 만원만 내자. 그런 식으로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하면 글세 교회는 유지가 될 것이다. 교회는 그래도 폼잡아서 성탄절 때 얼마 구제하고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것이겠는가? 그런데 보이는 현상으로 이 보이는 단체만 유지할려는 방식으로 여러분이 계산해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 놓고 하나님이 주시리라 해서 물론 주시기를 주시겠지요? 안 드린다고 안 주신 분은 아니니까 주시겠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쁨으로 누리는 삶은 아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라 그 말이다. 그러면 저는 더 고약한 요구를 하고 있지요? 다른 교회는 큰 사업이나 있을 때 집팔아라 하는데 나는 사업도 없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하니까 날마다 팔아라는 말인지 이것 참 고약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고약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짐이 더 무겁구나. 다른데보다 자유를 준 듯 한데 더 무겁구나. 그럴 것이다. 가족끼리는 알아서 하시라는 것이 제일 쉽다. 남하고는 그것이 제일 어려운 계산법이다. 가족끼리는 평생을 같이 살아서 너무 너무 쉬운 이야기인데 아무리 친한 친구도 우리 평생을 같이 살자 하면 조금 놀다 자기 집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독교인만 지키는 윤리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윤리다. 이것은 여러분 것을 전부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무엇을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는지 여러분이 분별할 것이고 목사도 저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 안한다 하는 재판관이 아니다. 구약 때처럼 그런 감독관이 없다. 여러분이 하실 일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조금 내고 자기 자식 키우고 부자로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가난해도 죽어라고 구제하고 항상 가난한 사람이 있고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열매는 주님 만나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의 몸으로 산다는 질서가 무엇인지 알면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목사가 할 수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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