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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하리라 (창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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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는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순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복의 근원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이 없을 때부터 그에게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알 같이 많겠다고 하십니다. 그는 이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이 말은 보통 상식으로는 전혀 생각 할 수 없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틀림없이 네가 내년 이맘때가 되면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부인 사라가 말 같지 않은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그렇지요. 이럼 말은 사라만 웃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100세에 낳은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이로써 그 가정에 비극의 불씨였던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습니다. 그 아들이 얼마나 귀한 아들입니까.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더 기막힌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그 아들을 잡아 번제로 바치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일찍이 일어나귀에 짐을 싣고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갑니다. 아브라함은 집을 떠난 지 사흘 되는 날 그가 보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산이 멀리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여기서 나귀와 함께 기다리라. 나는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오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손에 칼을 들고 그리고 불을 한 손에 잡고 갑니다. 당시에는 라이터나 그런 불을 붙일 수 있는 도구가 없었습니다.

이삭이 보니 좀 이상한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한다면 제일 중요한 제사할 소나 양이나 비둘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제사 드릴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사할 제물인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때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합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삭은 점점 이상합니다. 제단도 쌓았습니다. 아직도 어린 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 위에 나무를 쌓았습니다. 이젠 제물만 있으면 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단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이삭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삭은 각오 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잡아 하나님께 바치려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순순히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의 가슴을 향해 찌르려고 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 하는 줄 아노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이 나는 곳을 향해 뒤돌아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아들을 대신하여 잡아 제사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 하십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는다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줄거리 입니다. 이 말씀은 주전 2050년 전에 된 사건입니다. 저도 금년 맥추감사절에 즈음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리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 하셨습니다. 아들만 하셔도 알아듣습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하십니다. 이 아들은 보통 아들이 아닙니다. 그도 하나님이 주신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 사랑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어렵습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아마 이런 사건은 다른 어떤 데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기도 바치라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것만은 안 됩니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졸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안 믿습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보다, 아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난 예수 안 믿겠다는 사람을 쉽사리 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멀어도, 학원은 멀어도 보냅니다. 또 서울이나 다른 나라에도 유학도 보냅니다. 그런데 교회 좀 멀다고 다른 교회로 떠날 때는 목사로써 허탈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저가 목회를 제일 잘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로 가야할 사람은 억지로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서 더 하나님을 위해 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같이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여기 정말 하나님이 사람으로 멋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전적 순종했습니다. 어떤 이유도 달지 않았습니다. 가라면 갔습니다. 아들을 바치라면 바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엉뚱하다고 생각 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하필이면 이런 주문을 하셨을까 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러한 요구를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늘 우리는 그 뜻을 거부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상상 하지 못하는 일들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뜻을 접어야 합니다. 그게 곧 하나님의 사람이 취할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야 합니다. 멈추라 하시면 멈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요구하십니다. 정말 어려운 시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찬송도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잘 압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가장 기본인 주일성수부터 쉽지 않습니다. 수입의 십일조도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봉사가 어렵습니다. 늘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게 쉬운 일입디까. 그렇지 않지요.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게 어려운 일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경험한 사실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다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늘 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의 축복은 엄청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한번 보십시오. 아브라함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칼을 들어 아들의 심장을 향해 칼을 꽂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보시고 믿음의 아버지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정말 이런 기회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유명한 인사도 아닙니다. 너무도 평범한 시골뜨기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분에 넘치는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에 따른 어려운 고비를 넘어야 했습니다. 자기 외아들을 바치는 정말 어려운 과정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감사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단순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그만큼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기꺼이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런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본 받읍시다. 그의 길은 곧 하나님의 길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정치, 교육, 산업, 경제. 문화, 생활 등에서 개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개혁해야 합니다. 날마다 변해야 합니다.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세계는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람직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불안하고 늘 안절부절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유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축복의 문을 여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는 세 가지 원리로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건 다름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오직 은혜( Sola Gratia),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증인이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100세에 하나님이 주신 그의 외아들을 잡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너무 하신 것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가를 아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운 주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무사히 이 관문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건 누구든지 쉽게 할 그런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믿음의 아버지 될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한 번 정도는 생각하고 지나갑시다. 우리는 아들을 바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이아 반지, 집문서를 바치겠습니까. 저는 어떤 장로님이 어렵게 판잣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성전건축 공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족과도 아무런 의논 한마디 없이 그 집을 교회에 바친 것입니다. 물론 그의 아내는 동의 했습니다. 그런 그의 아들은 많이 섭섭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지요. 그런데 그 일 후에 그 장로님이 우리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그보다 몇 배 좋은 집도 사고, 자가용도 사고, 가게도 넓은 것 마련했습니다. 비단 포목을 취급했는데 너무 너무 잘 잘 되어 모든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비결은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판잣집(일명 하꼬방) 바치고 하나님은 맨션아파트를 주셨다 합디다. 이런 산 체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괜히 헌금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이 아직도 대구 시내에 살고 계십니다. 확인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은 천배도 더 주신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의 피가 필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늘 이런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5-06-21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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