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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창 1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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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봉독하신 말씀 가운데 1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신명기 18장 13절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신약 성경에 보아도 이런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가령, 에베소서 4장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저녁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권면은 ‘꼭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뜻은 아닌 줄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모두 온전함같이 우리 사람이 동등적인 의미에서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온전함같이 사람은 사람으로서 온전하라는 뜻인줄 생각합니다.
가령, 작은 촛불이 햇빛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햇빛이 온전히 낮에 비치는 것과 같이 작은 촛불이라도 가리우는 것이 없으면 작은 촛불로서 온전히 비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봄 동산에 피는 여러 가지 꽃 가운데 앉은뱅이꽃이 모란꽃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란꽃이 온전히 피는 것 같이 앉은뱅이 꽃도 앉은뱅이 꽃으로서 온전히 피는 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라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 ‘완전하다’는 뜻은 장성하고, 성숙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가령, 어른과 아이를 비교하면 어른은 장성하여 성숙한 의미에서 완전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는 불완전합니다. ‘완전하다’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장성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온전하게 자라서 온전한 자리에까지 이르라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주신 모든 능력을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뜻하신 그 온전한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인격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성의 최고 표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완전한 자리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신약성경 마태복음 5장 2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면서 “너희들이 이와 같이하는 가운데 점점 온전한 자리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령, 마태복음 5장 21-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한 말을 너희가 들어서 안다. 다시 말하면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으리라.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 대하여 노여워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을 것이요, 그 형제를 라가라고 하는 사람은 공회에 붙잡힐 것이요, 형제에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완전해지려면 여섯째 계명을 지킬 때 단순히 우리의 손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만 끊지 않으면 그것이 완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대하여 노여워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이미 우리 마음 가운데서 살인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이미 살인하는 까닭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노여워하는 사람은 마땅히 심판을 받을 것이요, 다른 사람을 라가라고 하든지 미련한 놈이라고 하든지 욕설을 하거나 저주를 하는 사람은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려고 하면 우리 마음이 이 계명을 지켜야 하며 근본적으로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의 원인이 되고 근본이 되므로 형제, 자매를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려고 제단에 가져 왔지만 네가 그때 네 형제 가운데 너로 말미암아 노여워하는 자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옆에 놓고 돌아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그 예물을 드리라. 그래야 네가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을 만한 제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네가 과연 하나님 앞에 예배하려고 할 때 너로 말미암아 노여워하는 사람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고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려야만 그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34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려고 할 것이면 먼저 화평의 생활을 해야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화평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이나 성품에 화평이 있고 그 생활이 화평을 구할 때 완전한 자리를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아니하고, 욕으로 욕을 갚지 아니하며 어떻게 하든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을 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분한 마음이라도 그 마음을 참고 원한을 마음 가운데 오래 품지 아니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 성 프랜시스가 자기 제자들과 같이 어느 산간에 있을 때, 어느날 저녁 프랜시스가 잠깐 어디 나간 사이에 산 속에 있던 도둑이 들어와서 그 제자들을 보고 먹던 떡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화를 내면서 “네 이놈들 너희들이 일해서 먹을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도둑질해 먹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선생님의 마른 떡까지 먹으려고 여기까지 왔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래도 그 때 도둑은 요즘 도둑보다 양심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제자들의 책망을 듣고는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프랜시스가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을 보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더니 프랜시스가 오히려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면서 “도둑이건 도둑이 아니건 배가 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인데 너희들이 왜 떡을 주지 아니했느냐?” 하면서 프랜시스는 제자들에게 떡을 내주며 “이제 이 떡을 가지고 산에 가서 그 도둑을 찾아서 이 떡을 꼭 먹이고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은 밤새도록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산 속에서 도둑을 만나 그 떡을 다 먹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 도둑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제자들과 같이 프랜시스에게 와서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 가운데는 프랜시스의 유명한 제자가 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려고 하면 우선 화평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선으로 갚아서 죄인을 구원하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27-3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간음하지 말라 옛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려면 단순히 육신으로 간음을 피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을 행한 것이니 우리 마음으로도 간음을 행하지 않도록 마음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네 오른 눈이 가장 귀하다. 그러나 네 오른 눈이 너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면 네 오른 눈을 뽑아 버리라. 한 눈만 가지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 다 가지고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손 가운데도 오른손은 매우 귀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오른손으로 말미암아 내가 범죄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 오른 손을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한 손만 가지고 천당가는 것이 두 손 가지고 지옥가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친구 가운데 아주 가까운 친구는 나를 많이 도와주는 친구가 있으나, 그러나 그 친구를 통하여 나로 하여금 제 7계명을 마음으로 범하는 그런 유혹이 있다고 하면 그런 친구와는 절교하라는 의미입니다.
전에 성 베네딕트라고 하는 사람은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아무리 힘써도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아서 너무 안타까워 온몸을 벗고 가시덤불 위에 뒹굴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마음의 청결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신부님에게 강의 한 과목을 들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카톨릭의 성직자는 독신생활을 하는데 학생 중에 어떤 이가 “신부님은 육신적인 욕구나 정욕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합니까?”고 물었습니다. 신부님 대답이 “추운 겨울 같은 때는 밖에 나가 얼음을 깨뜨리고 얼음 속에 벗은 몸을 던져서 온몸을 얼게 만들면 그런 정열이 꺼진다.”고 했습니다.
신부들이 담배를 피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녀들이 수녀원에서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제하고는 온종일 고된 일을 계속해서 저녁이면 다른 생각할 여지도 없이 잠이 들게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리로 나아가려 하면 마음으로 7계명을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33-37절에 보면 “헛된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를 했으면 반드시 그 맹세를 지키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맹세는 절대로 하지 말라. 너희 믿는 사람은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 하라. 그 이상의 것은 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옛날에도 사람들이 진실성이 없어서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고 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이 잘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할 때는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기도 하고, “성전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제단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풍속은 사람들의 말에 진실성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믿는 사람은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고 하고 다 믿을 만큼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려 하면 우선 말에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로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꼭 누구를 속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사실대로 하는 습관이 부족해서, 말을 주의해서 하지 아니하고 되는 대로 하니까 그대로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럽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사교적으로 거짓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교적으로 일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이거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장사하시는 분들은 상업적인 거짓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하여간 우리 한국에 내려오는 속담에 “거짓말이 장사의 반 밑천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은 으레 거짓말을 좀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한테도 물건 사고 팔 때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치적인 거짓말이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으레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사회에서 인식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어느 나라나 가령 신용을 강조하는 미국 같은 데서도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정치하는 사람을 꼽습니다. 으레 “정치에는 늘 진실할 수 있나 정치에는 늘 모략이 있고 거짓말이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정치인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정치하는 동안에 필요하면 무슨 말이든지 하고 나중에 책임지지 않고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는 말로 시치미를 딱 잡아떼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속된 세상에서 속된 사람들이 속된 일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하나님의 자녀된 너희는 말에 진실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점점 완전한 자리를 향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그리고 38-48절에 주님께서 두 마디로 말씀하셨는데 실상은 한 마디 말씀입니다. 처음 한 마디는 “옛 사람에게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차라리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까지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말씀은 “옛 사람에게 그런 말이 있거니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갚는 법은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하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은 말할 것 없이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의 하시는 대로 따라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 주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불의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소극적으로 한 가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원수를 도무지 사랑하지 아니하고 원수를 갚을 대로 갚아 보통 사람과 다 같이하면 보통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 있느냐? 세리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냐? 불신자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다른 사람보다 좀 나으려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다 가르치기는 쉽고, 듣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 원수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원수를 좋아한다는 말은 아닌 줄 압니다. 우리가 원수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원수가 하는 일을 찬성하고 협조한다는 말도 아닌 줄 압니다.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여기 예수님의 하신 말씀대로 하면 원수에 대해서도 악의를 가지지 말고 원수에게도 선의를 가지고 그 사람이 참된 축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원수라고 해도 우리 믿는 사람은 그에게 대해서 악의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다 복받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원수가 어떤 경우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에 내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으면 원수에게 먹게 하고 마시게 자비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마지막 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절에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주님이시여,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 대답하신 말씀이 “네가 계명을 알지 아니하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와 같이하면 네가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청년의 대답이 “그것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다 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완전해지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자리에 나아가려면 물질을 초월해야 합니다. 물질은 매우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즘은 소위 황금만능주의 시대라고 해서 돈만 있으면 그만인줄로 생각합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헤아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으로 사람의 인격까지 헤아려 보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은 언제나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리는 돈보다 귀합니다. 친구도 나라도 민족도 돈보다 귀합니다. 학교도 교회도 돈보다 귀합니다. 모든 생명은 돈보다 귀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돈보다 귀합니다. 그러므로 이 귀한 것을 돈하고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방면에 힘쓰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완전히 죄가 없는 자리에 올라갈 수가 있습니까? 웨슬레 같은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기독자의 완전론을 주장했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완전한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격의 완성에 대해서 표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가장 높은 표준에 이르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할 뿐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 1서 3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육신으로 이런 완전한 자리에 이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다음에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도 장성해서 주님과 같이 되겠다고 성경에 가르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다 높은 은혜를 사모하십시다. 낮은 데를 보지 말고 높은 데를 바라보십시다. 작년보다 금년은 좀더 높이, 지난 달보다 이 달은 좀 더 높이, 어제보다 오늘은 좀더 높은 은혜에 올라가서 완전한 그 지경에 이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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