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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사와의 면담과 중재 (창 1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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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우리가 생각하게 될 창세기 18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나눈 또 하나의 면담의 기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한 일에 대한 상급이라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보다도 더 소탈하고 절친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어떻게 영접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본 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했습니다.
“정오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은 휴식을 취하며 놀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나그네나 길손들을 숙박시킬 숙소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사람을 은혜롭게 찾아 주십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 그 세 사람이 자기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세 사람은 하늘나라의 존재들인데 이처럼 인간의 몸을 빌어 나타난 것은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게 하고 그와 대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극진한 정성으로 손님들을 영접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절에 보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대접한 일과 다음 장에 나오는 롯이 소돔성에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을 대접한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정성껏 대접했는지를 보세요.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매우 공손하고 정중히 대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청년이 아니었는데 그의 나이나 체면을 생각지 아니하고 극진히 정중한 태도로 ‘달려나가 영접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품위있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었으나, 아브라함은 갖추어야 할 모든 예절을 갖추어 ‘몸을 땅에 굽혔다’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은 아름다운 예절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더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모든 사람에게 예의 있게 대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정중한 예절은 경건을 표하는 훌륭한 장신구입니다. 그는 지극히 정성스럽게 그리고 성가실 정도로 손님들이 자기 집에 유하기를 간청했습니다. 손님을 모시게 되는 것을 큰 은혜로 여겼습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4절에는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했습니다.
여기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할 때 인사말로 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손님을 환영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남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모두 기꺼이 주는 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사랑과 성의로 대하는 사람과 같이 먹으면 음식의 맛이 나고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소화가 잘됩니다.
잠언 23장 6-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찬을 탐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열심으로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바랄 만한 손님이십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그처럼 갈망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접대했는데, 이 말은 그 음식이 오늘날과 같이 진수성찬이나 진귀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검소하고 소박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성이 거기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는 자기들의 최선의 것으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세심한 신경을 썼고 또 분주했습니다. 사라는 손수 요리를 하고 아브라함은 달려가서 송아지를 끌고 오고 우유와 버터를 가져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옛날 그 옛날인데도 손님을 모시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아브라함이 함께 일했습니다. 식탁의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손님을 환영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 문명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남자가 부엌일에 참여해서 같이 협력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그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몸에 배여서 남자가 부엌일에 관여하면 이웃이 흉을 봅니다.
가령, 아들네 집에 다니러간 시어머니가 아들이 며느리와 같이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보았다면 어떻게 할까요? 당장 아들을 불러 내놓고 “너는 사내가 체통을 차리지 못하고 그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야단을 칠 것이고 며느리더러는 “너는 어떻게 된 게 사내를 병신 만들 작정이냐?”고 호통을 칠 것입니다.
이런 문화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남자는 냉장고 문도 열 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꼭 좋은 관습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손님 대접할 때 사라를 거들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다정하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입니까! 우리 믿음의 식구, 여러분의 가정이 다 이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덕 있는 사람은 위엄을 나타낼 필요가 없으며 그들의 신중한 겸양의 태도도 그들을 경멸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우의는 죄를 내놓고는 어떠한 것에도 몸을 굽힙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겸손한 사랑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 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높임을 받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자체가 선행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선행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 21절에 “우리가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하므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26절에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사랑과 관대함 그리고 훌륭한 가정의 관리로 유명했습니다. 우리도 그에게서 선한 일을 행하고 전하는 것을 배워야만 하겠습니다.

이 하늘로부터 온 손님들은 아브라함의 친절한 대접을 받으며 그들은 아브라함의 친절에 보답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을 맞이하였고 천사들에게서 그 보답으로 하늘나라의 은혜로운 소식을 받았습니다.
손님들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아브라함은 “장막에 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오신 손님이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들었습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제 노쇠했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이제 무슨 그런 낙이 있을 수가 있을까?”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안 하늘의 손님은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하나님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환영하고 하나님의 방문을 환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보답하십니다. “내가 너의 친절에 보답하리니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약속을 반복했습니다.
남들은 일반 섭리로 얻게 되는 바로 그 축복도 믿는 사람들은 약속으로 얻으며, 이 약속이 그들을 기쁘고 확신에 차게 만들어 줍니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 우리들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을 그 약속에 의하여 받고 있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온 손님들은 자기들의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급히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용무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은혜를 전해 주는 심부름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앞에 또 다른 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소돔성을 멸망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돔의 죄악이 관영하여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의 사자들을 보냈습니다.

본문 16절에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했습니다. 그들은 소돔에게 진노의 얼굴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오랫동안 묵인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시거나 무관심하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이르게 되면 그들에게 얼굴을 돌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22절에 “그 사람들은 소돔을 향하여 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 두 분은 소돔에 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9장 1절에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했습니다. 세번째 천사는 아브라함이 그 앞에 섰었고 가까이 나아갔던 여호와였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천사들이 소돔으로 가기 전에 먼저 그들을 떠났었고 또 아브라함이 그 앞에 나아갔던 여호와의 후광, 그러니까 그가 전에 보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아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이 그 손님들에게 베푼 예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처럼 훌륭한 손님들과 헤어지는 것이 싫었고, 아쉬워서 그들에게 석별의 정을 표시하고 싶어서 함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처럼 성의를 다하니까 천사들도 아브라함에게 같이 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예우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예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소돔성을 멸하리라는 뜻을 아브라함에게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에 관해서 아브라함과 거리낌없이 의논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논의 상대자로 삼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17-19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소돔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그 이유와 더불어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결의가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그런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동행하면 지혜를 얻게 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이 중요한 일을 놓고 아브라함과 의논하신 것을 보세요.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말하지 아니하고도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 일을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하는 방식을 따라서 그의 뜻을 친히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중요한 일을 놓고 의논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허락하신 바 있으므로 그가 알고 동의하지 않고는 허락된 땅의 일부인 그 도성을 멸하지 않으려 하시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큰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친구요, 그를 위해 특별한 자비와 큰일을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이 될 것이고 더욱이 그에게서 유래될 메시야를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시편 25편 14절에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비록 예언자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별력 있는 실제적인 지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이유는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그의 권속들에게 알려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집안에서 가족과 함께 기도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지시했고, 가정에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했고, 예언자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서 그 권속이 할례를 받았고, 그의 지시를 따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녀들 뿐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권속들까지 돌보는 책임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종들까지도 아브라함의 훌륭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일을 그의 사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정직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산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약속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의무를 깨닫고 있는 사람만이 약속된 혜택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돔에 관한 그의 뜻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시며 그 문제에 관해서 하나님께 청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20절에 “소돔이 부르짖음이 크다”고 말씀했습니다. 죄인들의 죄악은 큰 소리로 하늘에 부르짖어 복수를 내려 달라고 소리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소돔의 죄악은 부르짖는 죄악이었습니다. 죄악이 극성을 부리면 하나님을 향하여 벌하여 달라고 재촉하는 것이 됩니다.
21절에 보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8231;&8231;&8231;&8231;&8231;&8231; 보고 알려 하노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소문이나 일반적인 평판 또는 남들에게서 얻은 정보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확실하고 무흠한 판단에 의해서 벌하십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들을 위하여 중재할 수 있는 여지와 용기를 아브라함에게 주시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 59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중재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씀과 기도로 유지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소돔에 관하여 작정하신 뜻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소돔을 대신하여 말씀드릴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며 또 기도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때는 우리도 그 말씀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23절에 보니 “아브라함은 가까이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는 담대히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기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사람들의 악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죄는 미워해야 마땅하지만 죄인들은 불쌍히 여기고 위해서 기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 안에 살고 있는 의인들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롯이 행한 일을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그런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의 잘못을 이미 용서했고, 지난번에는 그가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을 때 구출해 주었고, 이제는 기도로써 그를 구해내려는 열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몸의 지체요, 주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에서 그의 위대한 신앙을 볼 수가 있습니다. 효력있는 기도, 능력 있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함은 불가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은 “티끌과 같은 내가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고 자신의 미천함을 의식하면서 호소한 것입니다. 위대한 겸손입니다.
아브라함은 끈덕지게 요구하는 것을 인간에게 하면 화를 낼 수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 했지만 하나님은 설사 우리가 어떻게 보이더라도 “정직한 자의 기도에 대하여는 노하지 않는 분이십니다.”(시 80:4)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잠15:8)

그리고 아브라함의 기도에서 위대한 사랑을 봅니다. 소돔성이 심히 악하기는 했지만 그중에 의인이 몇이라도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최악의 곳에서 최선의 것을 희망했습니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망나니라고 저주해도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의인 50명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인의 숫자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보를 재촉했습니다. 나중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낮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아브라함이 간청을 그만둘 때까지 하나님은 양보를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기도를 마칠 때까지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데 절대로 싫증 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소돔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위대한 믿음으로, 위대한 겸손으로, 위대한 사랑으로, 위대한 용기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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