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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묘한 일 (신 29: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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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일(신 29:22-29)

인간에게 있어서 생존은 본능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날 때부터 이미 생존을 향한 끊을 수 없는 집착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선'이란 생존을 도와주는 것이고, '악'은 생존을 방해하는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은 자연적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생존을 도와주는 선은 환영을 하며 받아들이고, 생존을 방해하는 악은 힘을 다해서 밀쳐내는 세상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존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심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존 문제에 대해서 골몰하고 살아가는 인간을 향해서 생명을 알린다는 것은 핍박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생존이냐 생명이냐' 우리는 이 갈등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과 생명을 둘 다 취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존 문제에 집착을 하면 생명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고, 생명에 관심을 두면 생존문제에서 멀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생존은 인간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위해서 일하시지만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 문제를 돕는다!' 아쉽게도 성경에 이러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는 성경 전체가 인간의 생존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문제를 중점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온 자는 성경의 하나님을 증거했을 때 커다란 실망을 안고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 문제를 도와주는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세계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이 존재 이유로 되어 있고, 모든 관심이 생존 문제에 쏠려 있는 세상에서 '생명'이 인기 없는 과목으로 내팽개쳐지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생존 문제에다가 덤으로 생명을 끼워서 준다면 얼씨구나 하고 환영을 할 것입니다. 사실 현재 교회에서 말하는 것들이 생존 +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복음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위해서는 생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끊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 16:25절에서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영생에 관심을 두고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도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떡(생존)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오는 군중을 피해서 달아나 버리는 것을 봐도 예수님은 우리의 생존 문제에는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생명을 보여주고 생명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생존 문제는 단지 육신을 살리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생명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고 영원히 사는 문제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소경을 만나면 소경의 눈을 띄워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본 자가 진짜 눈을 뜬 자이고 생명을 보지 못한 자는 눈을 뜨고 있다고 해도 소경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씀을 하신 후에 사람들이 배가 고파하자 오병이어라는 기적을 행하시면서도 그 목적은 사람들의 배를 불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병자를 만나서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 들린 자를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시었던 모든 일들은 인간의 생존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한 개인 개인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하셨던 모든 일은 결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개인을 잘되게 하든 못되게 하든, 또는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번성하게 하든 멸망하게 하든 그 모든 일 속에는 '생존'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문제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서 하늘의 생명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날 때부터 자기 생존에 관심을 두고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이 하신 일,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을 자기 생존과 연결시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생명의 떡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는데, 생존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은 그 기적을 '자기 배부름'이라는 생존의 문제로 이해해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쫓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생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6,27)고 말씀하십니다. 즉 생존 문제를 썩은 양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일하는 그것이 곧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즉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오직 생명을 위해서 살라고 하시니까 '지금 당장 급한 내 생존 문제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는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모세가 바로를 만나 내 백성을 내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바로는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고역을 내리게 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더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원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자기 생존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둠으로서 '하나님의 생명'보다는 단지 현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고생을 하는 삶에서 벗어날 것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바로가 가져다 준 고역을 다만 모세 때문에 겪게 된 고생으로만 바라봤던 것입니다. 즉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고생을 단지 고생으로만 바라보고 고생에서 벗어나기만 소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보다는 생존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가는 생존을 꿈꾸고 원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들의 그런 기대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습니다. 즉 인간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 넘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오묘한 일'이라는 말로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묘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오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법칙은 세상 상식과 법칙을 따라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칙과 원리를 따라서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속에서 오묘한 그 이치와 뜻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하늘의 법칙을 따라서 살아갈 때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의 법칙과 상식을 고집하고 살아간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서 그 오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묘한 일이라고 해서 무슨 신비스러운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의 상식과 법칙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오묘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냥 보통 일이고 일상적인 일이지만 하늘의 눈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 속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놀라운 진리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앞에서 예로 들었던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를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은 오병이어라는 기적 자체를 오묘한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병이라는 기적이 오묘한 일이 아니라 그 기적이 담고 있는 '하늘의 떡'이라는 것에 오묘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상식과 법칙으로만 오병이어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단지 예수님을 따라가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기적이란 단지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는 단지 기적으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떡을 말해주는 표적으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병이어의 오묘함은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했던 조그만 떡과 물고기를 통해서 '하늘의 떡을 통해서 얻어질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참 생명'을 나타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오묘함을 단지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인간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명의 문제냐 생존의 문제냐'라는 각기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때, 한쪽은 오묘함을 깨닫게 되고 다른 한쪽은 단지 썩어질 양식을 구하는 차원으로만 그쳐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왜 호렙산에서 언약을 하시고 또 다시 모압 땅에서 약속을 하시는가에 대한 것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세월을 고생하고 난 후에 생각하는 하나님과 40년의 고생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을 나오도록 하신 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생존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의 언약안에서의 생명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또 40년간 광야에서 편안 삶을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생존 문제로 인해서 고생을 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스라엘이 생존 문제에 집착을 하고 생각한다면 나올 것은 원망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 그 뜻과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현재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고생스러운 환경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를 굶어죽게 하고 목말라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나오게 했는가?'라는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아니었습니까? 결국 생존 문제에 집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게 하신 하나님의 일은 단지 고생이었지 결코 하나님의 오묘한 일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의 세월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오묘함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신 8: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대로 40년의 고생의 세월에 담겨진 오묘함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오묘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단지 고생하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한숨이고 신세타령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언약 안에 참예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서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내 백성이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약안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 일을 돕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언약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해서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이 무너진 것 같이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이 진노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절한 까닭임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22-28절). 이것이 진노와 재앙에 담겨 있는 오묘함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오묘한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구석구석에 담겨 있습니다. 다만 생존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지함과 미련함 때문에 하나님의 오묘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라는 것은 그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지 결코 우리의 생존을 도와주기 위해서 개입하신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 문제를 도와주기 위해서 개입하신다면 이스라엘에게 언약이니 생명이니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생존 문제를 돕는 하나님,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16: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말리는 베드로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것을 말립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으로 보면 베드로의 태도가 합당합니다. 스승이 고난받고 죽겠다고 하시는데 '예 죽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할 제자가 있겠습니까? 스승이기에 말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말리는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라고 책망을 하신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단지 예수님 한 개인의 죽음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자기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단지 생존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그것이 사람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일은 하늘의 생명을 위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비록 베드로의 말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말이었다고 해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내 진심으로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생존을 벗어나서 생명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기도, 생존을 위한 예배, 생존을 위한 헌금, 생존을 위한 설교,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입니다.

고전 2:11-14을 보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오묘하고 신령한 일을 분별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성령이 함께 한 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롬 8:5-6절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생존과 생명의 문제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생존을 좇아 사는 자는 결국 자기의 생존의 문제만을 생각할 것이고, 생명을 좇아 사는 자는 하늘의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 영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 육신의 일은 무엇이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종교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영의 일이며 일상생활에서 살아가는 것은 사람의 일 육신이 일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생존의 문제에 집착해서 생존을 위해서 생존을 쫓아 살아가는 모든 것을 사람의 일 육신의 일로 말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좇아 살아가는 것은 그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오묘한 일입니다. 단지 우리들이 생존에 집착하고 생존에 쫓겨 살아가다보니까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좇아 살아가는 신자에게 있어야 할 사람의 태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연으로 돌리거나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일을 통해서 저에게 어떤 오묘한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십니까?'라고 물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귀한 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항상 자기 생존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아는 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생존에 위협을 주는 상황이 닥쳤다고 해도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나더러 하늘의 생명만을 소망하라고 하시는구나'라는 오묘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존재 이유를 벗어나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먹고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존재 법칙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삶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하늘의 생명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는 것은 우상입니다. 그런 우상을 섬겨서 천당 간다고 우기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저런 일을 겪게 하십니다.

인간이 생존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해야 먹고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이러한 형벌 속에서 고생하지 않는 편안함을 추구하다 보니 돈을 외치게 됩니다.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 살아가는 생존에 집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거절합니다. 생명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고생스런 삶은 징벌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고생을 통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분명한 수긍이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사모하는 자, 즉 생명을 좇는 삶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생존을 위해서 살았던 삶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으셨던 삶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생존이 아닌 생명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속에서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는 무궁무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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