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호와 너희 하나님 (민 15:32-41)

첨부 1



여호와 너희 하나님(민 15:32-41 )

얼마 전에 TV에서 고려대 교수를 지냈던 김용옥 씨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강의 내용중 '오늘날의 독재자는 어린아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그 말에 많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어린아이를 현시대의 독재자로 키우는 사람들은 바로 부모들이라고 질타했습니다. 소위 부모라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독재자'로 키우고 '막가파'로 키운다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열의는 아주 대단합니다. 내 자식을 사회에서 번듯하게 출세시키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매사에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감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기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기보다는 감싸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율성을 키워준다는 취지아래 자식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를 들지 않으려고 하고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분별하게 뭐든지 들어줍니다. 자식이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표시를 기죽이지 않고 통제하지 않고 야단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어떻게 매를 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부모들이 자식을 독재자로 만들어 갑니다.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하려고 하고, 부모가 자기 말을 다 들어주듯이 남들도 자기 말에는 다 복종을 해야 하고, 무엇이 잘못된 일이고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인가는 전혀 무시해 버린 채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어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길거리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은 어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어른에 의해서 통제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명목 아래 자기가 우상이 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따라 자신의 희망사항대로 움직이려고 하고, 어른은 무조건 자기들의 생각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여깁니다. 원하는 것은 무조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쩔쩔맵니다. 부모가 자식의 눈치를 보며 삽니다. 심부름을 하나 시켜도 '나 공부해요''나 숙제해요'라는 말 한마디에 꼼짝을 못합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내세울 무기는 공부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습니다. '나 공부해요'라는 말 한마디가 부모를 꼼짝못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자녀가 우상이 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저는 오늘날 자녀문제에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식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사십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훌륭한 자녀로 성장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다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녀로 성장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제가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부모가 내 자녀가 교회를 출석했는지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험 때라서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하면 '알았다. 교회가지 말고 공부해라'고 하는 것이 지금 부모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앞서 말한 대로 공부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 버리는 세태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녀들의 문제점이 아니라 바로 부모의 위치에 있는 어른들의 문제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야 자기들의 생각과 상식대로 자녀를 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모든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자식을 키우는 문제에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하는데 과연 지금 여러분들은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자녀들을 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모된 여러분들부터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자녀들을 대하고 있습니까? 자녀를 의식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지옥을 두려워한다고 하면서도 자식이 지옥으로 가는 것은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식이 지옥으로 가도록 부추기고 도와주고 있는 지금 현실을 볼 때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란 부모된 자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라고 있는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자식을 보내주신 것은 자식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신앙의 나태함과 게으름에서 깨어나라고 자녀를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귀하게 여기는지를 자녀를 통해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여러분을 지켜봅니다. 자녀를 바라보면서 내 자식이다, 귀엽다, 사랑스럽다고 하면서 무조건 예뻐하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을 아는 자녀로 키워야 한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고민하는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합니다. 자녀를 보면서 자신의 신앙의 삶을 점검할 수 있는 부모가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모일 것입니다.

제가 자녀문제를 말씀드리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에게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많이 언급했는데 과연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시는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지, 아니면 여전히 내중심으로 사는지는 여러분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 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산다면 공부, 출세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믿음을 우선으로 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믿음보다는 공부, 출세를 앞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서 믿음의 문제를 잠시 보류하는 것도 인정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대학 합격한 후에도 얼마든지 신앙생활 할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이 하나님을 위해서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한 후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육신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믿음보다는 자신을 앞세우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이고 봉사를 잘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신앙이 좋다는 칭찬을 수없이 받으면서 자녀에게는 공부를 우선으로 하고, 출세를 요구하고, 공부를 잘해야 남에게 기죽지 않고 살 수 있고, 공부가 네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친다면 과연 그것이 믿음이 있는 모습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며 진심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자녀를 지옥으로 밀치고 있으면서 과연 자녀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부서뜨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르치지 않고 오직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만 가르칩니다. 교회가 신자를 독재자로 막가파로 만들어 갑니다. 신자 한사람 한사람이 교회에서 독재자로 군림합니다. 목사만 독재자가 되어 가고 목사만 막가파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자기에게 미쳐있습니다. 오직 자기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우선입니다. 세상만 막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신자도 막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뒷방이나 차지하고 있는 늙은 어른 정도로 여깁니다. 어른은 어른인데 자식에게 꼼짝하지 못하고 주는 밥이나 먹고 헛기침이나 하고 있는 어른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도무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을 강조하다보니까 신자들이 하나님을 산타클로스나 인자하신 할아버지 정도로 인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도 하나님을 여러분 마음대로 상상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해서 신앙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우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민수기 15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일에 대해서 지시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유아를 제외하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4:23,24,31). 그런데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일에 대해서 지시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말씀하심으로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가를 교육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세력을 더 두려워한데 있습니다. 대장부가 눈에 보이자 이제는 가나안 땅이고 뭐고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서 빨리 하나님이 약속하신 좋은 땅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만으로 가득차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애굽의 재앙에서 살아났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사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인식해야 했던 것입니다. 제사란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고 만나실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마련하신 만남의 장소라고 했습니다. 무턱대고 제사드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바치면서 제물의 죽음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제물이 죽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물을 드리면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며 말씀에 복종하고자 할 때 그 자가 바로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범죄했을때는 하나님께 그냥 나오지 못합니다. 소나 양을 대신 잡아 죽여야 합니다.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무서우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예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모세와 아론과 회중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나무했다고 죽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만약 지금도 이 말씀같이 한다면 누가 과연 하나님께 나오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안식일을 범한 사람을 온 회중이 죽이도록 하심으로서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합니까? 먼저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규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안식이란 애초에 하나님의 안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의 조건은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이 깨어진 것은 인간이 말씀 안에서 살지 못하고 자기에게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의 규례를 말씀하신 후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잊지 말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을 아는 자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몸을 더 귀하게 여겼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가나안에서 살 수 없는 모습으로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나무쯤이야 하면서 가볍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가볍게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혀 용납하지 않으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볍게 들려집니까? 지금 우리가 주일에 나무하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 주일에 교회에 출석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출석한다고 해도 세상을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아가려고 힘쓴다면 그것이 곧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 이스라엘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다 죽는다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나무 하나 한 것을 가지고 죽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떨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당당하게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없는 늙은이 정도로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의 모습임을 기억합시다.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도저히 주일에 교회에 나올 수 없는 형편이 아니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와야 할 이유는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일에 교회에 나옴으로 '나는 내 수고와 노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산다'는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주일에 육신의 일 때문에 교회를 뒤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내 수고와 노력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 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가지를 지시하십니다. 이스라엘 대대로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옷을 멋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39,40절에 보면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고 합니다.

청색 끈 달린 술을 옷에 붙여서 옷을 입을 때마다 술을 보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술을 달아라는 말씀이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을 온 회중이 돌로 죽인 뒤에 나온 것으로 보아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날마다 대하게 되는 옷을 통해서 여호와의 계명을 어긴 자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나도록 하시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39절에 방종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에 이끌려서 내 마음에 드는 대로 내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방종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방종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죄에 대한 점검도 없이 우리들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떠들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술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찾으십시오. 인자한 할아버지, 산타클로스 같은 하나님은 사단이 제공하는 가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은 그리스도의 피안에서만 베풀어집니다. 방종으로 살면서 무턱대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생각하는 것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여러분의 옷의 술로 삼고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자신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말씀이 들려질 때마다 소홀히 듣지 마시고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로 들으십시오. 직장을 다니건, 사업을 하건, 자녀를 키우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만 바라보고 쫓아가십시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자다운 신자가 되는데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