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7월의 제사 (민 29:1-6)

첨부 1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악은 상대적으로 선이 등장을 해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선이 없는데 악의 모습이 드러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을 선으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들에게는 눈이 둘 달린 것이 정상입니다. 날 때부터 모두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에서 눈이 하나인 사람을 보내면서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때 여러분은 그것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눈이 둘 달려 있는 것을 정상으로 알고 살아왔던 사람이 한 개를 정상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보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자기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늘서 보낸 정상적인 사람을 정상으로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둘러 볼 때 온통 보이는 것이 눈이 두 개인 사람이고 자기 역시 눈이 둘인데 어떻게 하나를 정상으로 인정하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악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이 둘 달린 나라에 눈이 하나 달린 사람을 보내서 눈은 한 개가 정상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눈 하나를 없애라는 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눈 하나 달린 사람을 세워놓으시고 너희가 비정상임을 인정하느냐를 묻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날 때부터 눈이 둘이고 자기 주위도 모두가 눈이 둘인데 자신이 비정상이라고 인정이 되겠습니까? 이것을 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가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정상적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세상이 다른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교회는 눈이 둘 달린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눈이 하나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비정상입니다. 우리는 눈이 하나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극히 정상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고 '지금의 내 모습은 비정상입니다. 나도 주님의 모습으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모여드는 것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교회란 눈이 두 개가 비정상인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눈 하나를 빼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 하나를 빼서 정상적인 사람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 하나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 모습이 정상적인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인 것을 알고 자신의 비정상을 인정한다면 너희도 눈 하나인 사람으로 취급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정상적인 인간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노력과 몸부림을 다해도 비정상적인 인간이고 죄인이며 정상적이고 의인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밖에는 없다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이 달라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이 달라지기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면 그 역시 처음부터 교회를 잘못 생각하고 잘못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내가 달라져서 돌리는 것이 아니고 나같이 비정상적이고 악한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흘리셨다는 것을 증거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항상 솔직해질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달라지려고 노력하게 될 때 결국 나타나는 것은 위선과 형식과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신이 달라짐으로서 만인으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자기 사랑의 욕망입니다. 자신이 변화되어짐으로서 자신의 믿음에 만족하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고자 하는 열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꽃은 죄인이라는 땅에서만 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과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긍휼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고 큰가를 알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긍휼이 상대적으로 더욱 더 강조되어지고 그리스도의 피가 더욱 더 높임을 받게 하기 위해서 죄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교회의 역할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드러내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십자가의 피의 공로의 위대성과 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모일 때 우리는 우리의 일, 교회의 일을 앞장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앞장세우게 됩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은 교회의 성장과 하등의 연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단지 죄인 아닌 자를 죄인 만들어 가기 위해서 일하실 뿐입니다. 피의 공로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피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믿는 것 대신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단지 예수라고 하는 이름만 빌려올 뿐입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을 앞세워서 온통 자기 일로 북적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으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집단이고 하나님의 적으로 등장한 집단일 뿐입니다.

50년 100년된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예배당의 예술성을 자랑하는 이런 모든 것이 그리스도보다는 내 교회에 가치를 두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교회에 역사와 전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는 십자가에 가치를 두고 십자가만 자랑하면 됩니다. 교회의 가치는 십자가를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지 예배당의 예술성이나 50년 100년된 인간의 역사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의 가치평가이고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의 할 일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목사의 할 일은 누가 그리스도의 피를 무시하는지 지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가치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없습니다. 나도 내 교회도 그리스도의 피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이고 썩어질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로 하여금 피흘리게 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까? 신자는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일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제사드리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제사드리는 것이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사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를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부추깁니다. 자기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나를 미워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것이 얼마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초에 만드신 정상적인 인간은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에 의해서 이웃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후로부터는 나 때문에 이웃이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평생토록 남에게 해로운 일 안하고 살았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숨을 쉬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해야만이 피해가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안해서 이웃에게 피해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뭉쳐져 있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거부함으로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는 이웃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웃이 어려울 때 그들을 도울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거부함으로 어려운 자들이 더욱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웃에게 사기 치고 고의적으로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이웃에게 해를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 욕망을 앞세움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칼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자기 입장을 내세우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 고집을 위해서 수시로 상대방을 칼로 찌르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내 감정과 기분을 앞세움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면 그 즉시 칼을 내세워서 방어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서로 웃고 만나고 악수하지만 언제 적이 될지 알 수 없는 인간 관계입니다. 서로 찌르고 찔림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평생을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았는데 그 칼에 의해서 찔린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29장을 보면 7월 한 달은 제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6절은 나팔절에 대한 규례이고, 7-11절은 대속죄일 규례, 12-38절까지는 초막절에 대한 규례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 절기는 다르지만 그 공통점은 속죄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초막절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 23장이나 레위기 23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절기이지만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을 볼 때 출애굽기에서의 추수의 의미는 장래 약속의 땅에서 곡식을 먹는 것에 두고 있지만 민수기에서는 곡식을 추수하는 의미는 사라지고 속죄의 의미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에서 곡식을 추수해서 먹는다고 해서 죄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용서에 의해서 사랑이 공급되고 생명이 공급된다는 의미가 새롭게 실려있는 것이 민수기의 초막절인 것입니다.

결국 7월의 제사는 속죄가 중심입니다. 속죄란 7절의 말과 같이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7월의 제사의 모든 중심을 속죄에 두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를 원하십니다. 자기의 죄를 알고 인간의 악함을 아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쓸데없는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회개하는 것임을 안다면 자신이 학력이 없고 돈이 없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낙심하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학력이나 돈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로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죽어야 한다' 이것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7월의 속죄입니다.

또 한가지 7월 제사의 공통은 속죄와 함께 노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자신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노동을 쉬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노동에는 인간의 건강, 지식, 경험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쉬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도 그것은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쓸모 없다 하신 것을 가지고 자랑하거나 경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건강도 지식도 경험도 다 하나님의 일에는 쓸모 없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신자들이 그러한 것을 따지고 있다면 결국 자기 힘으로 노동을 해서 하나님이 일을 이루어보겠다는 심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이나 지식을 내세워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건강으로 일한다면 병들고 힘이 없고 나이 드신 분들은 아무 쓸모 없는 존재들입니다. 돈으로 일을 한다면 가난한 분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지식으로 일한다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천당 가고 못배운 사람들은 지옥가야 하는 것입니까? 설사 이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회에는 건강하고 지식이 있고 돈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지 못하고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는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입니다. 노동을 쉬면서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자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신자입니다. 자기에게는 쓸모 있는 전혀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기 자랑이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홀로 다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힘을 앞세울 때 그 순간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모아갑니다. 자기 사랑이 부인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석교회를 통해서 사랑을 얻고 싶어하시고 영광을 얻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셨을 뿐입니다. 사랑이 보여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봉사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속에 칼을 품고 사는 인간입니다. 항상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입니다. 그런 나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보여졌다면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곧 자기 사랑을 포기한 증거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모일 때 교회가 평안하고 가정이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7월의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모이며 이웃과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어지는 이스라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는 속죄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죽이지 못한데서 불행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기 일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자기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를 죽이지 못한 채 하게 되면 결국 남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게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아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먼저 나를 죽이는 제사를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이 생각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피흘려 죽는 제물과 함께 여러분 자신이 죽어짐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간직한 자로 새롭게 태어나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