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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난관을 극복하는 길 (느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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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이차 전도 여행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에 가서 더베와 루스드라, 이고니온등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좀더 아시아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는데 밤에 환상이 보여졌습니다. 마게도냐 한 사람이 나타나 그에게 청하여 마게도냐로 건너와 그들을 도와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그곳으로 부르심인 줄 알고 아시아 지역의 비두니아로 가기를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게도냐로 간 것입니다. 그런에 고린도후서 7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며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로 가게 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데 왠걸 길이 순탄하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란과 타툼, 두려움으로 인해 육체가 편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그의 명령을 잘 따르면 복과 평안이 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더 어려움만 생기니 어찌 그리스도를 따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1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열심을 내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한테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인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겠다는데 산발랏과 다른 사람들이 훼방을 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훼방정도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자존심까지 건드리면서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들을 비웃으면서 말합니다. '비웃으며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본문의 '미약한' 이라는 말은 매우 점잖게 번역된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별 볼일 없는' '너무도 시원찮아 불쌍하기까지 한' 이런 뜻입니다. 비웃음을 당하면 누구나 흥분합니다. 자존심을 건드려 놓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면 그 사람과의 관계회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연결하려고 해도 안되요. 그만큼 심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유다 민족을 깔아뭉개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왜 그리스도를 잘 따르려고 하는데, 잘 섬겨보려고 하는데 이런 문제가 생깁니까? 무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The devil never kicks a dead horse.' 사탄은 절대로 죽은 말을 걷어차지 않습니다. 건드리지 않아도 이미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롤 힘차게 살아있는 자들은 반드시 걷어차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넘어지게 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사람, 이미 유혹에 빠져 넘어진 자들은 사탄의 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이 사탄의 대상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사탄의 공격은 강해질 것입니다. 이런 결정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새벽기도 시작해보겠다는 결심같은 것 말입니다. 새벽기도 해보려면 꼭 그 전날 늦게 자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평소에는 찾아오지 않던 친구가 와서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려두었던 일을 갑자기 다 정리하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 일을 붙들고 밤 늦도록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가기가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한 중간에 있으려고 할 때면 반드시 우리 삶에 유혹과 고난이 다가온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따르려고 하면 할수록 사탄의 방해는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흥왕하면 할수록 사탄의 방해공작도 강력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모든 것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어려움을 없애주는 방법입니다. 고민할 거리가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도할 필요도 없고 말씀을 가지고 씨름할 필요도 없도록 환경을 장미빛 침대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돈도 넉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환경에서 허물어지기가 가장 쉽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교회는 핍박아래서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고난의 불기운을 지나지 않으면 성숙이라는 것은 연약한 줄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전진한다는 말은 움직여간다는 말입니다. 움직이려면 반드시 거기에는 마찰이 생깁니다. 마찰이 없이는 움직여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찰을 이겨낼 전진의 힘이 없어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진을 기대한다면 마찰이라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결코 반발없이 전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멋진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정확한 방법을 알고 있지 않으면 그 공격은 엄청나게 치명적인 것을 염려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해결의 방법을 말씀을 통해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일 첫 번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말합니다. 방금 포로에서 해방된 너희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느냐? 예전에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었는데 내 보내었는데도 다시 되돌아오는 거예요. 스스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너희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긍심을 깍아내립니다. 무능하다고 자꾸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벽을 세워봐야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서 뒤 흔들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고 절망감을 심어줍니다. 너희들은 할 수 없다고 자꾸만 되내입니다. 너 스스로를 알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지난 번에도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속에서 생각나게 합니다. 자, 그들이 본문 1절 하반절에서 3절까지 계속해서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공격에 대한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의 대꾸가 본문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 해결방법입니다.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 제 일:'쓸데없이 맞붙어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에 신경을 쓰면서 에너지를 다 소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포커스를 그런 말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남의 말 한마디에 온갖 신경을 다 씁니다.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남의 말 한마디 듣기 위해서 오는 것처럼 그들의 말에 온갖 안테나를 다 세웁니다. 누가 나보고 뭐라 그러나 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한마디 듣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말이 공격의 가시가 담겨있지 않으면 좋은데, 가시 담긴 말이면 그 말을 두고 두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말 때문에 잠까지 설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싫어집니다. 나오기가 겁이 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신경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물론 저는 그런 좋지 않은 말 하는 사람을 옹호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잘못되었지요.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대로 그런 사람이 없기를 기대할 수가 결코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공격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해결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남의 비판이 아니고, 남의 말 한마디가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현명한 대응 방법을 보십시오.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신경을 꺼버리십시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지침을 한가지 알려드릴까요? 저보다 결혼 생활 오래하신 분들이 더 잘아시겠지만요, 부부싸움을 하면 두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투수와 타자 형태입니다. 말하자면 부부중에 누구 하나가 공을 던지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되받아 쳐야겠다고 이를 악물고 있는 그런 싸움입니다. 이런 싸움은 치열하지요? 던지면 받아쳐야 속이 후련하니까 말이지요? 또 다른 한 형태는 투수와 포수관계로 싸움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던지면 받아버리는 것입니다. 더 세게 던져도 휙 받아버리는 것예요. 맞장구를 쳐야 싸움이 되는데 접시 던지면 접시 받고, 베게 던지면 베게를 받아주니 그런 싸움이 곧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한 사람이 투수가 되면 상대는 빨리 포수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시면 결혼 생활을 여유있게 합니다. 투수와 타자로 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도 느헤미야는 그런 공격에 맞붙어 대꾸하면서 싸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피하십시오. 쓸데없는, 근거없는 비난의 말들을 그냥 무시해 버리십시오. 신경을 쓰면 쓸수록 머리만 아프지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포커스는 그들의 공격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지금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벽 재건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신경전을 벌일 여유가 없습니다. 해야할 일, 주님을 섬겨야 할 일, 주님께 예배드려야 할 일, 가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가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런 것들에 의해 우리의 집중력이 흐트러져서는 안됩니다. 목표만 보십시오. 이런 신경전이 저의 신앙의 삶에 유익할 것인지, 주님의 원하시는 사역을 해나가는데 도움이 되는지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사실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지요.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대책이 있어야 이런 공격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두 번째 해결 방법입니다. '눈을 하나님께로 고정하라' 다른 것에 우리의 신경과 관심과 해결책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일이 잘 진행되어 오지 않았습니까? 약 40군데로 나누어 일을 맡고 하나씩 하니씩 잘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발이 생긴 것입니다.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다시 기억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처럼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 눈을 돌려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강력한 문제, 강력한 원수가 등장합니다. 이런 원수를 갚는 일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나에게 있습니까? 내가 그 문제를 맞붙어 해결할 수 있습니까?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설혹 있어도 그 승리는 처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너 죽고 나 죽자'라고 덤비는 사람 아닙니까? 싸우려고 덤벼드는 사람하고는 맞붙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는 비껴나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해결방식을 발견하십시오.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장 19-21절.
하나님께 맡겨버리십시오. 분노하면 할수록 해결은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내가 해결하려고 하면 내가 더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께 눈을 돌리는 현명함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약 22세정도된 청년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병명도 모른채 하루하루 지나갔습니다. 너무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유명한 무당이 있었습니다. 무슨 병이든 그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면 다 나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굿을 하라고 말했지만 집사인 어머니는 하나님을 섬기는 집사가 굿을 할 수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친척이 권합니다. 남편이 권합니다. '여보 신앙도 좋지만 아들부터 살려놓고 봅시다. 당신 고집 때문에 아들 죽겠소.'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이 벌떡 일어나 '어머니 그 무당 좀 데려다가 굿 좀 하세요. 그러면 내가 꼭 나을 것 같아요' 당황한 어머니 '애야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한다면 너하고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과는 영원히 끝난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잃어도 하나님은 잃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어떻게 굿을 할 수 있겠니?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뒷동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럴때는 내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나님, 나는 무당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보시고 내 아들을 고쳐 주옵소서'
그 순간 집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석에 누웠던 아들의 입을 통해 사탄이 소리를 지르며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신앙도 꺽지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고 억울하다. 억울하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바로 그 어머니 집사의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인내하는 신앙으로 그 아들을 포함해 4명의 아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가 되어 많은 영혼을 목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몫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 분은 일을 이루시고 책임지시는 몫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지막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라' 세 번째 문제해결은 '당신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정성껏 마음을 들여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반발이 있다고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닥쳐왔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을 견지하고 일을 진행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말씀대로 마음을 들여 역사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역의 중간에서 포기합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기권하고 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기도만 하면서 사역을 중단합니다. 그러나 기도와 함께 우리의 사역은 계속되어야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따라서 최선을 다해 어려움 가운데서도 일을 진행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일의 중간에 끼어드는 문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발견하고 중단없이 나가면 때가 이르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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