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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민 갔다가 망한 사람 (룻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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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는 흉년을 피해 다른 나라로 이민 갔다가 완전히 망해 버린 한 집안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민을 갔기 때문에 망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민을 가지 않고 자기 나라에서 흉년을 견디며 살았더라면 이렇게 망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나 암시가 본문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이방인의 땅으로 이민을 갔어야 했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도 가뭄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곤란한 일을 당한 적도 있었고, 이삭도 가뭄 때문에 그랄로 갔다가 아내를 빼앗길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모두 그 닥친 고난을 인내로 좀 더 견뎠으면 좋았을 뻔했지요. 여기 나온 사람들도 흉년을 만나 모압으로 이민을 가기보다 베들레헴에 남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지키며 고난을 견뎠으면 더 좋았겠지요. 왜냐하면 그 땅은 약속으로 주신 땅이었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순종할 때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버리고 먹을 것을 찾아 이방인의 땅으로 갔다는 것은 잘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도 이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을 떠나서 이방인의 땅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그들과 같이 이민을 온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정착하고 잘 살게 되었다면 우리 마음도 좀 더 편안할텐데, 이민을 갔다가 망해버렸다니까 우리 마음도 답답할 수밖에 없지요.

성경에 보면 이민을 가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요셉을 들 수 있겠지요. 그는 자청해서 이민을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다가 노예로 팔려 먼 애굽까지 가게 되었는데, 파란만장한 시절을 지낸 다음 결국 그 이집트 대제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을 모두 초청해서 모시고 오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 이민온 땅에 뿌리를 내리고 큰 민족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세도 이민 몇 세대만에 크게 출세한 케이스입니다. 그가 출세한 것도 정말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온 민족이 노예가 되어 압제를 당하는 와중에 졸지에 애굽의 왕자가 되어 지배계급의 최상부에 편입되었으니까 말하자면 행운아였던 셈이지요. 먼 후대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은 강제로 포로로 끌려가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강제 이민이지요. 거기서도 출세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바벨론 대제국에서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얼마 후 에스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도 되지 않는 매우 희귀한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낯선 환경, 다른 문화, 본토인들의 따가운 시선 등을 참아내며 힘겹게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본토인들의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별처럼 빛나는 것은 본토인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음모에서 동족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민생활은 기본적으로 어려움을 안고 출발합니다.

우리가 이 뉴질랜드에 와서 사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강제 이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온 이민이라면 보다 나은 삶을 찾아나선 길입니다. 바로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자기 사는 곳이 만족스럽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이민을 갈 이유가 없지요. 우리들도 모두 더 나은 삶을 찾아 이곳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고향에서 큰 상처를 입고 떠난 사람도 있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 떠나야 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고향이 나에게 맞지 않아서, 혹은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의 꿈을 펼칠 수가 없어서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자녀들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키워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에 온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황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들을 더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이스라엘 땅은 평안할 날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애써 농사를 지어놓으면 원수들이 쳐들어와서 곡식을 불태워버리거나 뺏어갔습니다. 씨를 뿌려 새싹이 나올 때가 되면 원수들이 와서 모조리 짓밟아서 밭에 곡식이 아예 자라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살기가 힘들어서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그런데 그나마 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아마 먹을 것을 구경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던가 봅니다. 서러운 것 중에서도 가장 큰 서러움이 배가 고픈 서러움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먹을 것이 귀했습니다. 그래도 나무껍질 벗겨먹고 풀뿌리 뽑아먹었다는 어른들 이야기 들으면서 우리는 행복한 세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아들에게 절약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옛날 쌀이 떨어져서 굶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쌀이 떨어지면 얼른 수퍼에 가서 라면 사다가 먹으면 되지 왜 굶어요?'

사실 배고픈 서러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지요.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지독한 가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서 고향을 등졌습니다.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정든 고향, 조상의 땅을 떠나 미지의 땅, 이방인의 땅을 향해 떠난 것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가지 않았겠어요? 모압 땅에 가면 그래도 먹을 것은 얻을 수 있었던가 봅니다. 한참 자랄 나이의 아들들이 배고파 우는 소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라도 이민을 가야 했습니다. 모압 땅에 가서 자리를 잡고 큰 부자가 되어 평생 편안하게 살 생각까지는 안 했더라도,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이 되었겠지요?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이웃들과 왕래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써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집도 새로 사고 땅도 마련해서 농사짓고 살림 꾸려나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가도 즐기고 문화생활을 할 여유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민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함께 고생하면서도 서로 바라보며 위로가 되던 남편, 집안의 중심이 되어 흔들리지 않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머나먼 타국에 이민와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을 때 이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나오미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억척스럽게 두 아들을 잘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희생과 수고가 보상을 받는 순간을 맞았습니다. 아들들이 장성해서 며느리들을 보게 된 것이지요. 이제 조금 있으면 손자들이 나오미의 손에서 재롱을 부릴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오미는 끝내 그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 두 아들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어디 있을까요? 네 식구가 이민 왔다가 남편 죽은 것만도 뼈에 사무칠만한 한인데, 두 아들마저 가슴에 묻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새 희망을 가지고 이곳으로 이민왔던 한 가정이 완전히 몰락하고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는 할머니만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새 삶을 찾아 이민을 와서 고생하며 살아온 결과가 겨우 이것이란 말입니까? 혼자 남은 나오미는 고향을 떠나 이민온 것을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그를 위로해 줄 친구가 있습니까? 의지할 친척이 있습니까?

제가 한국에 있으면서 뉴질랜드에 이민갔다가 가진 것까지 다 털어먹고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동아인지 어떤 월간지에 쓴 글에 보니까, 괜찮은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도 팔고 있는 재산 정리해서 최후의 지상낙원이라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답니다. 한국에서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바쁘게 살면서 아이들과 조용히 지낼 시간도 없었는데, 과연 뉴질랜드는 아름답고 한가해서 가족들과 함께 즐기기도 너무나 좋았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정착하느라, 또 앞으로 살아갈 계획 세우느라, 새롭게 펼쳐진 내일을 바라보면서 들뜬 마음으로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뭔가 하면 지금까지 돈을 쓰기만 했지 조금도 벌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싸게만 느껴지던 물가가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비싸졌습니다. 할 일은 없고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가족간에 다투는 일만 많아지고, 작은 애는 엄마 따라 수퍼에 갈 때마다 이것저것 사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얻어터져서 안 울고 올 때가 없었답니다. 꿈을 따라 새 삶을 찾아 온 곳이 지긋지긋하고 의미없는 고통의 연속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짐을 싸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구체적인 계획이나 확실한 기반 없이 떠나는 이민이 마치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처럼 허망한 것이라고 했더군요.

그때야 저는 뉴질랜드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는 상태에서 우연히 그 글을 읽게 되었는데, 제가 여기 와서 이렇게 이민오신 분들과 함께 살아가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또 와서 보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더군요. 저도 역시 그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물가가 싸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수퍼에 한번 가면 계산서에 찍혀나오는 금액 보기가 겁이 납니다. 제가 이번에 자동차 사고를 내고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내가 잘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벌금에다가 법정에 출두도 해야 하고, 이쪽 저쪽 보험회사에서 통지서 날아오고... 그나마 몸이라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 일이 나겠더군요. 우리가 아직 이 사회의 제도나 통념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이런 것들이 다 이민와서 사는 사람들이 넘어야 할 산입니다. 우리가 이민자로서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크게 성공하게 되기까지는, 아비멜렉과 나오미와 같은 실패와 고난을 무수히 겪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실패와 고난이 밑거름이 되어 다음 세대가 꿈과 이상을 활짝 꽃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민갔다가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 사람이 나오미 뿐이었겠습니까만, 그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서 같은 처지의 우리가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나오미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이민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한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처지의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는다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와 같이 이민와서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크신 일을 이루셨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었지만 그 실패한 인생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인생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 이민와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고 때로는 실패했을지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하나님,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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