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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과부가 부르는 비가 (룻 0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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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과부가 부르는 비가(悲歌) (룻 1:6-14)

1. 불행한 여인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기구한 운명의 한 여인의 형편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목숨 태어나서 잠깐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짧은 인생이 할 수 있는 대로 행복하고 의미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겠지요. 그런데 살아가는 동안 슬프고 괴로운 일만 겪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는 호의호식하고 권력을 누리는 반면, 누구는 가난과 고난 속에서 고통스러운 인생을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대답해 주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불행하고 고통을 당한다면 모르지만, 왜 어떤 사람들은 나오미처럼 유난히 불행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명쾌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 사실이지만, 나오미 같은 가련한 여인의 운명을 죄로 인한 것이라는 일반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불행에 대해서 하나님께 따지거나 그 이유를 물어보아서 해답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역에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물론 욥이 당했던 고난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욥 자신에게는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불행을 당했을 때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결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했던 욥의 아내처럼 반응했다면 결과는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그 불행에 의해 파멸을 당하는 것뿐이지요.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그런 것이 되기 쉽습니다. 결국 그 고난으로 하여금 우리를 파멸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고난과 불행에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불행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극심한 불행에 처해서 그 불행에 굽히지 않고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불행은 불행을 부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오미는 벌써 불운한 여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고향을 등졌다가 먼 타향에서 남편을 잃은 것만 해도 가장 불행한 사람들의 대열에 낄 자격이 충분하겠지요? 그런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나오미는 두 아들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쳤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불운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그 불운도 전염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사람들 말처럼 이 집안 가계에 저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과부의 아들들에게 시집온 두 젊은 여인들도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나오미의 불행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룻과 오르바가 겪은 불운을 생각해 봅시다. 이 두 젊은 여인들의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던 중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것만은 분명합니다. 정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는 여자들이 있을까요? 어떻게 시집오자마자 남편이 죽어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기가 막힐 일이지요. 이 여인들은 어쩌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데서 이민 온 사람들과 결혼한다고 이웃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든 이제 결혼을 했으니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입니다. 집안의 반대나 이웃들의 수군거림도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남편이 죽어버렸으니 집안과 이웃들에게 버림받고 의지할 남편도 없어져버린 것이지요. 둘 다 잃어버린 셈입니다.

2. 고향가는 길의 눈물노래

그런 와중에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고향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 10년 동안 고향에는 계속 흉년이 들다가 그 해부터 풍년이 들었었는지, 아니면 그 전에 벌써 가뭄이 끝나 양식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나오미가 알게 된 것은 이제 고향에도 먹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은 나오미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이지요. 멀리 이 모압땅까지 이민왔던 이유가 이제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의 이민은 원인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원상태로 돌아가야죠. 이제 고향에 먹을 것이 있다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모르겠네요. 혹시 이민생활에 맛이 들어서 이곳이 고향보다 다 좋게 생각되었다면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오미는 이민 왔다가 완전히 망해버린 여자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앗아간 이 땅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고향에 먹을 것이 있다면 당연히 돌아가야죠.

그래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재산을 다 처분하고 정리할 것 정리한 다음에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는 이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희망을 찾아온 나오미에게 고통만 안겨준 땅, 도무지 나오미를 용납하지 않았던 이 모압 땅을 영원히 떠나려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의 발걸음도 가볍지는 않았겠지요. 위로를 얻으러 왔다가 슬픔만 가득 안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흉년이 좀 들었다고 이웃과 친척을 뒤로 하고 떠나온 나오미가 다시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정말 면목이 없는 노릇입니다. 떠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돌아오느냐고 핀잔을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웃의 반대와 손가락질 속에 고향을 떠났지만 그래도 이민 와서 잘 살면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국에서 남편 잃고 자식들을 잃었으니 여기서 살 수도 없고 창피해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창피를 당하더라도 고향은 나오미가 최후로 의지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오미의 처지와 두 며느리들의 처지가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나오미는 자기 고향을 떠나 모압 땅에 온 것처럼, 두 며느리들도 자기들이 속해 있는 집단을 떠나 나오미의 집안에 시집왔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나 두 며느리들이 선택한 새로운 환경은 그들에게 좌절만 안겨주었습니다. 결국 양쪽 모두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나오미의 처지나 두 며느리들의 처지가 똑같습니다. 과부가 되었다는 것이 똑같고,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처럼, 이 며느리들도 그들의 민족에게 돌아가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뙤약볕 아래 자갈길에서 세 여인의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날 따라와 봐야 평생 과부로 살아야 할 터인즉,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 시집가서 잘 살라고 돌려보냅니다. 그러자 며느리들은 늙으신 어머니를 어찌 홀로 보낼 수 있느냐며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봉양하며 한 평생 그렇게 살겠다고 우깁니다. 그러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웁니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 아닙니까? 그러나 보는 사람에게는 감동적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인 이 세 여인, 세 과부들에게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의 순간입니다. 과부가 과부 슬픔 알지요. 이 세 여인들은 자기의 신세가 슬퍼서 울고 또 상대방의 신세가 처량해서 울고, 그래서 그들의 울음소리는 두 배, 세 배로 커지면서 하늘로 사무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심청이 눈먼 아버지를 홀로 두고 떠나던 심청가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선원들에게 팔려 떠나기 전날 밤, 심청은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내가 철을 안 후에 밥 빌기를 놓았더니마는, 내일부터는 동네 걸인이 또 될 것이니, 아버지를 어쩌고 갈꼬. 닭아, 닭아, 우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기를 설잖으나, 의지없는 우리 부친을 어이 잊고 가잔 말이냐.' 아침에야 사정을 알게 된 심봉사는 또 이렇게 목을 놓아 울지요. '눈을 팔아 너를 사지, 너 팔아 눈을 뜨면, 무엇 보자고, 눈을 뜨고. 철모르는 이 자식아, 애비 설움을 너 들어라, 너 낳은 칠일만에, 너를 안고 다니며, 동냥젖 얻어 먹여, 이 만큼이나 장성. 묵은 근심 햇근심을 너로 하여 잊었더니, 이것이 웬 일이냐. 나, 눈 안뜰란다.'

3. 슬픔과 불행을 극복하려면

여기 나오는 세 사람, 나오미와 룻, 오르바는 비록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라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어진 사람들입니다. 아들이 살아 있어야 며느리이지요. 또 남편도 없는데 무슨 시어머니가 있습니까? 자식이라도 있으면 할머니가 되겠지만, 지금 이 세 사람을 묶어주는 끈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장 남남으로 돌아설 수 있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서로에 대한 애정은 앞 못보는 아버지와 낳은 지 7일 되던 날부터 그 아버지가 젖동냥으로 키운 외동딸 사이의 애정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나오미의 가정은 풍지박산이 나긴 했지만 원래 그 가정은 매우 건실한 가정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나오미는 그처럼 가정을 성공적으로 꾸려왔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고부간의 갈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정불화의 씨앗입니다. 우리 어머니들 세대만 해도 한국 여인들의 삶의 형태는 시집살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집살이의 가장 큰 원인은 고부간의 갈등이고, 이 시집살이는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세대에 세대를 거쳐 반복되면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당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자기가 당한 만큼이나 혹독하게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가정에서 시집살이나 고부간의 갈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랑과 신뢰 위에 가정이 건설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건강한 가정, 이것은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초석입니다. 건강한 가정에서 사랑으로 자란 자녀들이 타락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반면에 결손가정이나 툭하면 삼차대전이 일어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영혼은 상할 대로 상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슬픔을 당했다면 어느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그 슬픔을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나오미의 가정은 슬픔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슬픔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영국의 C.S. 루이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원래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기독교를 반박하는 변론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고 나서는 사울이 바울 된 것처럼 기독교를 변호하고 지키는 탁월한 변증가가 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그 후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잃고 말지요. 극심한 슬픔에 빠졌던 루이스는 훗날에 자기가 하나님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아내를 데려가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슬픔을 딛고 루이스는 기독교 변증에 있어서 보배같은 많은 책들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슬픔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가 슬픔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건전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슬픔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 기쁨을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처럼 사랑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서로 위로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인간관계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지 못하도록 굴복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슬픔을 이겨내고 그 슬픔을 승화시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오히려 귀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누구에게 이런 슬픔이 닥칠지 우리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슬픔을 주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에게 큰 슬픔이 닥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믿음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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