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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오미의 귀향 (룻 0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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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의 귀향 (룻 1:19-22)

1. 돌아오는 사람

나오미는 마침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마지막으로 입에 풀칠이라도 해 보려고 찾아온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낯이 뜨거워서 사람들 만나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아예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겠지요.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온다는 것이 염치도 없고 창피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중국의 조남기 부주석이 우리나라에 와서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대통령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금의환향을 축하한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충북 청원 사람인데 12살 때 할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서 마침내 부주석까지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고생을 많이 했더라도 결국 크게 성공을 하면 당당하게 고향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경우는 정반대입니다. 나오미가 돌아왔을 때 온 성읍이 떠들면서 맞이한 것을 보면, 고향을 떠나기 전의 나오미 집안은 유력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모습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만큼 변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고 하는 말이 '이가 나오미냐?' 하는 것입니다. 야, 이거 정말 나오미 맞아? 나오미라면 옛날 우리 동네에서 제일 멋쟁이 아줌마였잖아? 그런데 웬 할머니야?

여기서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지요? 죽지도 않은 아버지의 재산을 억지로 뺏다시피 상속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흥청망청 놀아나다가 나중에는 돼지밥도 얻어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작은 아들입니다. 나갈 때야 큰소리 치며 나갔겠지요. 성공한 사람은 나갈 때 죄인처럼 나갔다가 큰소리 치며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은 나갈 때 큰소리 치며 나갔다가 돌아올 때 죄인이 되어 돌아온 사람입니다. 나오미가 하는 말을 보세요. '내가 나갈 때는 풍족하게 나갔더니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누가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염치없이 돌아오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오죽 돌아오기가 힘들었으면 그 작은 아들이 돼지치는 일을 했겠어요? 돼지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면 끝내 안 돌아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온다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은혜의 기회입니다. 작은 아들이 모든 자존심을 포기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풍족한 아버지의 귀한 아들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잃어버린 그 인생이 회복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실패해서 돌아오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돌아옴으로써 그 실패가 만회되고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사람은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난을 받거나 매라도 맞을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돌아와야만 그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돌아가야 하는데 부끄러워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용기가 없어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돌아온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그러나 돌아오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돌아와야 고통이 멈춥니다. 때로는 돌아온다는 것이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또는 교회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불편한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자존심을 꺾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돌아올 때, 그 관계가 회복되고 냉전이 끝나게 되지요. 그래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돌아올 때 고통이 끝나고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으니

나오미는 자기를 맞는 고향 사람들을 피하거나 몰래 숨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지금 동네 사람들이 열어준 환영식에 참석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이제 내 이름은 마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습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쓰다,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는데 어찌 나오미라는 이름이 합당하겠느냐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의 신앙고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먹고 살겠다고 모압으로 이민갔다가 지지리도 재수가 없어서 남편 죽고 두 아들마저 죽었으니, 내가 저주를 받은 년이지...' 하면서 신세타령을 할 만도 하지만, 나오미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오미가 지금 자기를 괴롭게 한 하나님을 원망하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의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전능자이십니다. 그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시겠다는데, 내가 무슨 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저 주시는 대로 괴로움을 당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마라라고 불러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실패하고 상처로 얼룩진 모습이지만, 사람들 앞에 있는 그대로 내보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저의 친구 목사 한 분이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 어느 큰 교회의 부목사였는데, 저녁예배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쌀을 주시면 쌀밥을 먹고, 라면을 주시면 라면을 먹고, 아무것도 안 주시면 굶어야 합니다. 불만 있습니까?' 설교의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말이 너무 재미있어서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은 전능자이십니다. 그 전능자께서 우리를 괴롭히시겠다는데 우리가 도망을 가겠습니까? 아니면 대항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케세라 세라 하는 식으로 될대로 되라거나, 숙명론에 빠져서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주어진 분량만큼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 영역 안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나오미가 모압으로 이민을 간 것이나 우리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온 것은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적성에 따라 대학을 가고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국문과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인생은 나의 것'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고, 그분의 커다란 계획과 섭리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이 강력하게 간섭하심으로 우리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나오미가 얻은 것

나오미는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랬습니다. 전에는 상당한 재산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지금은 옛날에 가지고 있던 토지를 되살 돈이 없습니다. 당장 남의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다 끼니를 때워야 할 형편입니다. 그러니까 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가지고 모압에 이민가서 다 까먹고 온 셈입니다. 가족 수를 보아서도 그렇지요? 나갈 때는 네 식구였는데, 그것도 남자가 셋이었으니까 노동력이 풍부했었는데, 이제 여자 둘만 돌아왔습니다. 나오미의 손익대조표는 그야말로 빨간색 투성이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나오미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무형의 재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원래부터 나오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녀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지 않고 간직한 셈이고, 만약 그것이 모든 재산과 가족을 잃은 대가로 얻은 것이라면,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 혹은 더 가치있는 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하는 나오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생을 달관한 경지에 이른 것이고, 신앙적으로 말하면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할 때는 아주 궁핍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지금 궁핍하기 때문에 변명하느라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어느 정도의 인격수련을 해야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침에 우리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려고 차에 올라타 있으면 아이들이 탑니다. 그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어요. 우리 아이들은 자가용 타고 등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 자가용 타고 등교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곤 했습니다. 애들 망친다느니, 위화감 조성한다느니 하면서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고액과외에 해당될지 모르겠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 아이들이 한 세대 전의 삶으로 돌아가서 생존할 수 있을까요? 여름이면 뙤약볕 아래를, 겨울이면 눈보라 속으로 한시간, 두시간 걸어서 학교에 가는 일에 자족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람이 좀더 나은 환경에 적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더 나쁜 환경에 적응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이웃의 존경도 받고 어느 정도 행세도 할 수 있었던 나오미가 이제는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처신하기나 적응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나오미의 태도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내가 좀 궁핍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 문제없다' 하는 식입니다. 내가 전에 잘살았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던 것이고, 지금 궁핍한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니 나는 아무 불만이 없다 하는 것이지요.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제가 어렸을 때 부친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넉넉하구나' 하는 말씀을 종종 하셨어요. 물론 부친 당신의 말씀이 아니라 옛날 성현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동의가 되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대장부냐? 고작 필부의 자기변명일 뿐이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기개를 가져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천하를 평정하는 사람도 대장부이겠지만, 나물이나 나무 껍질로 연명해야 하는 궁핍함 속에서도 아무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이 허풍이 아닌 한, 훨씬 더 대단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결론으로 뭐라고 말하는지 보세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풍요한 가운에서도 교만하지 않고 궁핍에 처해서도 비굴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주님이 주시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전능자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이처럼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만 타고 학교에 다닌 아이들은 십리, 이십리 먼 길을 걸어 학교 다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환영만 받고 살았다면 그러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에 이민갔다가 크게 성공해서 금의환향했더라면, 이런 믿음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혹독한 시련 속에서 나오미의 믿음은 정금처럼 강하고 순수하게 다듬어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그런 고난이 없이 나오미 같은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우리에게도 그런 고난을 통해서 믿음을 단련하실지 모릅니다. 어찌됐든 우리의 믿음이 비천한 중에나 풍부한 중에나 늘 전능자가 우리 삶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족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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