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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룻 0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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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새해인사를 할 때 흔히 '올해에는 소원 성취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말 큰 기쁨이지요. 여러분은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감격과 기쁨을 이기지 못했던 기억을 갖고 계십니까? 이번 광복절을 맞아 남북한에서 각각 100명씩 그동안 헤어져 살고 있던 가족을 방문해서 만나도록 했습니다. 수십년 동안 생사도 모르고 헤어져 살던 가족들, 어머니, 남편, 형제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쁠까요? 그야말로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저는 신학교에 합격했을 때 정말 기뻤었습니다. 신학교 시험을 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어요.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300명 정도 신입생을 뽑는데 그 중에 60명에게만 석사학위를 주는 거예요. 그나마 그것도 30%는 총신대학 출신 중에서 성적이 좋은 졸업생들에게 무시험으로 배당을 해요. 그러니까 42명밖에 남지 안 남지요? 그런데 시험과목이 뭔가 하면 성경, 영어, 철학, 논문이에요. 신학과나 영문과, 철학과, 국문과 나온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되어 있잖아요? 저처럼 대학에서 고려시대의 토지제도라든가 프랑스혁명 같은 것만 배운 사람은 어쩌란 말입니까? 물론 공대 나온 친구들에 비하면 제가 그나마 유리할지 모르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합격했어요. 41등을 했는지 42등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사학위를 받는 60명 안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고 300등 안에만 들어도 목사 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그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때 제가 광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저녁에 시내에 나갔다가 공중전화로 결과를 알아보고는 제 아내를 껴안고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그때는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이 아가씨는 목사한테 시집간다고 하는데 제가 신학교에 합격 못하면 꽝이잖아요?

여러분도 모두 마음 속에 바라는 소원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는 기쁘지요. 제가 최근에 영주권을 받았는데, 영주권이 나오기 전까지는 걱정이 많이 됐었어요. 제가 영주권이 없다고 하니까 새로 오신 채영이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전에 순복음교회 전도사님이 비자가 만기되어서 갑자가 떠나는 바람에 교회가 와해되어버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되면 어떡하느냐는 것이지요. 저야 어차피 애초에 여기 살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주권이 안나와서 떠나게 된다 해도 그렇게 섭섭하지 않지만, 문제는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자리를 잡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것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으셔서 떠나라고 하시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분명히 결정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그렇게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 저는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보아스가 성문에 모인 백성들 앞에서 합법적으로 룻과 결혼하게 된 것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형식은 나오미가 팔아버린 토지를 되사는 것이지만 정말 중요한 알맹이는 룻과 결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성과 장로들이 보아스에게 축복해 주는 말을 보면, '당신이 산 땅이 복을 받아 많은 소출을 얻게 되고 그것으로 당신이 더 부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땅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누구에 대해서만 말합니까? '당신의 집에 들어가는 이 여인, 룻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집이 복을 받고 큰 집안을 세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백성들 역시 이 문제의 핵심은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은 보아스의 소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물론 보아스가 오랜 세월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소원은 아닙니다. 보아스가 이 소원을 갖게 된 것은 겨우 어젯밤의 일이지요. 그러나 이 소원은 어젯밤 이후로 보아스가 모든 일을 제쳐둘 만큼,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을 만큼 강렬한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보아스는 모든 백성 앞에서 그것을 공포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굉장히 자제를 했겠지만 속으로는 엄청 기뻤겠지요? 보아스가 더 기뻐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 소원이 무척이나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어렵지도 않은 것은 소원이 되지도 않습니다. 가령 우리 아이들이 닭고기 먹는 것을 소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에게는 따뜻한 화롯가에서 맛있는 음식 한번 먹어보는 것이 꿈에도 그리는 소원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보아스의 소원이 허락된 것을 보면서 우리의 소원이 허락될 수 있는 몇 가지 원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선 보아스는 그 소원에 합당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보아스는 이방여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선민의식으로 눈이 먼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려는 대상을 민족적인 편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룻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문을 조성하시면서 특별히 이방여인을 포함시키기로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포함되기로 작정한 이 이방여인의 후손으로 세상의 구세주를 보내시려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십니다. 그런데 편협한 선민의식으로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이 이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룻을 아내로 맞는다는 것은 이방여인을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시키려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소원을 허락받기 위해서는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원이 나에게 합당한 것인지, 그리고 그 소원에 내가 합당한 사람인지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가령 장로가 되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라면 장로에 합당한 인격과 신앙, 지도력이 구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선심으로 표를 얻어서 장로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소원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장로가 되었다면 하나님이 그 소원을 합당하게 여기셔서 이루어주셨다고 인정할 수가 없지요. 또 교회 일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지위에 격을 맞추기 위해서 장로가 되려는 소원을 가졌다면, 이것도 합당한 소원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누구든지 소원을 갖는 것은 자유입니다. 무슨 소원을 갖든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그러나 그 소원을 가졌으면 그 소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소원을 허락받을 수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선교사가 되겠다는 소원을 가졌다고 합시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소원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인종차별 성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의 현지인들을 열등하게 여기고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그 소중한 소원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돈의 노예입니다. 돈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돈이 생기면 없는 사람 무시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될 사람이라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그 소원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지요. 태권도 챔피언이 되는 것이 소원인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버릇은 다른 아이들 괴롭히고 싸우는 것입니다. 태권도 챔피언의 소원에 합당한 아이입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을 위하여, 또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나아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선한 소원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소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소원에 합당한 사람에게만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소원에 합당한 사람인데도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이심과 상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우리로서 우리에게 합당한 소원을 갖는 것, 그리고 그 소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보아스가 평소에 보여준 성실하고 관대한 삶이 그로 하여금 어떠한 소원이라도 허락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을 여기서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어렸을 때 부친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선행을 쌓은 집안에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게 된다는 말이지요. 지금 보아스에게 딱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동안 보아스가 얼마나 많이 선행을 쌓아왔습니까? 모압에서 돌아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나오미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습니까?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고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나오미와 룻에게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습니까?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그저 모든 위험과 유혹에 노출된 룻을 이 보아스는 얼마나 정성스럽게 보호하고 챙겨주었던가요?

보아스의 선행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형제 엘리멜렉과 그 아들 말론을 최대한으로 예우하는 것이지요. 이미 죽은 사람을 가장 예우하고 위해 주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지내고 때로는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단 한번 죽으면 살아 있는 우리가 그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별 짓을 한다 해도 한번 죽어서 결판이 나버린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선포된 심판이나 상급에는 변동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손을 쓸 수 있는 때는 숨을 거두기 이전이지 그 이후가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든가 죽은 사람을 위해 선행을 한다거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모두 아무 쓸데없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은 가족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해 주신 이야기에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잘먹고 잘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갔는데, 그 지옥 고통이 너무나 괴로워서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그러는 중에도 이 부자가 기억하고 염려하는 것은 아직 죽지 않고 남아 있는 가족들입니다. 그 가족들은 이 고통받는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은 자의 소원은 천국에 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천국에 간 사람은 남은 자기 가족들도 이 천국에 오도록 해 달라고 하겠지요. 어쨌든 죽은 사람들이 지상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기억하고 염려한다면, 엘리멜렉과 말론은 나오미와 룻이 그 가난과 고독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보아스가 이처럼 큰 호의와 도움을 베풀어주었으니 정말 감사한 일 아닙니까? 결국 보아스는 살아있는 나오미와 룻에게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엘리멜렉과 말론에게도 큰 친절을 베푼 것입니다. 이처럼 선행을 쌓은 보아스의 집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마땅한 일 아니겠어요?

'심는 대로 거둔다,'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 이런 말은 이 세상에서 수학공식처럼 항상 정확하게 적용되고 이루어지는 법칙은 아닙니다. 심었는데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또 행하지도 않았는데 과분한 보응을 받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법칙을 마치 수학공식처럼 정확한 법칙으로 믿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선행을 쌓았는데도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상을 해 주실 것입니다. 악행을 쌓았는데도 형벌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더 큰 세계,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 이처럼 분명해지는 것이지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마음 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으시지요? 저는 여러분의 그 소원들이 모두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 소원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합당한 소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최근에 또 하나의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무런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는 분열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도 큰 상처를 입고 하나님 앞에 큰 허물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부끄러움을 우리에게서 제거해 주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도 아물어지고, 용서하지 못한 것 다 용서하고, 그래서 다시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저는 이 소원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원에 합당하게 행할 때, 하나님께서 머지 않은 장래에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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