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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을 마실 때에도 (삿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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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마실 때에도 (삿 7:4-8)

오늘 좋은 날씨 속에서 야외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어디에서 드리는가 하는 것은 2차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장소는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리는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성전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전을 지었던 솔로몬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을 다 지어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대하 6:18).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라는 사건 이후에 여호와 종교는 성전이라는 장소가 중심이 되는 장소중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성전이라는 장소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년에 몇 차례씩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야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라는 장소와 여호와 하나님이 어느 정도 동일시됩니다. 이러한 장소중심적 사고는 우리 믿음의 지평을 매우 제한시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을 쌓으면 그곳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세워진 다음에는 아무 데나 제단을 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 즉 아무 곳이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곳이 성전이라는 개념에서, 제사를 위해 만들어진 일정한 장소, 즉 성전에만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매우 협소한 개념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장소중심적인 사고에서 자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야 그리스도인이 되고 집에 오면 그리스도인이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장소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장소중심적인 사고에서 생겨난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예배당 문화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무리를 해 가면서 기를 쓰고 분에 넘치게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신앙적 사고가 장소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지하실 셋방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대리석의 웅장한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온 몸으로 느껴집니다.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지금 밖에서 드리는 이 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좀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장소중심적인 사고의 영향 때문입니다. 예배당에서는 경건하게 드려지는 예배가 여기서는 몸가짐도 흐트러지고 예배드리는 마음의 자세도 해이해졌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예배라면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예배도 아닌 것입니다. 비록 피아노도 없고, 소란스럽기도 하고,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것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여기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으면, 아무것도 없는 언덕에 새로 제단을 쌓는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여기에 왔다면 이 호숫가에 제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 그 심정으로 말입니다. '야외예배니까 목사님이 설교도 간단히 하시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 있으세요? 사실은 저도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외예배니까 설교를 짧게 끝내야지. 그런데 설교준비를 하다가 회개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야, 오늘 목사님이 설교 오래 하려고 작정을 했나 보구나' 이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평소보다 길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 호숫가에서 저는 기드온과 함께 강가로 내려가야 했던 10,000명의 군사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10,000명의 군사들은 군중심리에 의해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분비되어 자기가 감당하지도 못할 약속을 덜컥 해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속으로는 두려워 떨면서도 겉으로 태연한 척했던 사람들, 남들이 나라 구하러 간다는데 나도 가야지 하면서 덩달아 따라온 사람들, 안 가고 싶지만 남들 보는 눈도 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왔던 사람들은 그 22,000명 가운데 포함되어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남은 이 10,000명은 그래도 자신의 결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동안 미디안 놈들의 횡포에 피폐해진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 그 원수 갚을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분연히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려는 의지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애국자들이지요. 뿐만 아니라 겨우 10,000명으로 135,000명과 싸우겠다는 용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10,000명으로 저 미디안 연합군과 어떻게 싸우겠다는 말이냐? 지금은 때가 아니니 돌아가서 다음 기회를 노리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벌써 22,000명 속에 다 들어갔습니다.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인생과 내 민족을 이렇게 비참하게 짓밟아놓은 저 미디안 놈들을 하나라고 죽여야 울분이 풀릴 사람들만 남은 것입니다.

인원과 화력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사기와 정신력에서는 이 10,000명의 군대가 미디안의 연합군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았겠어요? 어쩌면 이들은 황산벌 전투에서 스스로 꺼져가는 나라 운명의 최후가 되기로 작정하고 결전에 임했던 계백장군의 결사대와도 같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진짜 군인입니다. 군복만 입었다고 다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군복을 입고 이등병 계급장부터 하사 계급장까지 달고 2년 몇 개월 동안 살았지만, 도대체 군대라는 것이 정이 안들더군요. 싸워야 할 가상의 적은 무슨 일본놈도 아니고 바로 우리의 형제였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나와 내 형제의 안전이 눈앞에 위협을 당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연습, 사람을 죽이는 훈련, 이런 게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역시 저는 현실 속에서 군복만 입었을 뿐 군인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이라도 전쟁이 일어나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워야 할 때라면, 비록 예비군 복무기간이 끝났을지라도 전투에 나갈 마음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저도 진짜 군인이 될 수 있겠지요.

이 10,000명의 군인들은 모두 진짜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10,000명이 다 필요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뽑겠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군대를 모집하는데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지금 전쟁통에 육군사관학교 신입생 뽑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사람이 아쉬운 형편인데, 하나님은 이 많지도 않은 10,000명 중에서 골라야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 기드온과 함께 전투에 나가게 될 사람들의 의미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숫자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10,000명의 군인들 모두 용감하고 책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든지 시험이나 경쟁을 통해서 적합한 사람들을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시험으로 합격자들을 뽑아야 할까요? 당장 전쟁을 해야 하니까 칼싸움을 시켜 볼까요? 아니면 많은 사람을 손쉽게 떨어뜨리기 위해서 어려운 수학문제를 낼까요? 사실 시험이라는 것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 가진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다른 기준을 들이대서 많은 사람들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했었습니다. 만약 제가 해군사관학교에 갔더라면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저는 정말 해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원은 해 놓고 시험을 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보나마나이기 때문입니다. 응시자격에 색맹이나 색약은 안 된다는 규정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색약이거든요. 색약하고 해군 장교가 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색약은 해군 장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어떠한 공무원도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떨어뜨릴 구실이 되는 것뿐입니다. 색약은 심지어 군대에서 하사도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제가 하사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하사가 되었는지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지요. 그렇다고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보지 마세요. 무슨 비리나 부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불합리한 시험의 기준에 불만이 많은데, 오늘 보니까 마치 하나님도 그러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라고 해 놓고 엎드려서 마신 사람들은 불합격, 손으로 떠서 마신 사람들은 합격이 된 것입니다. 나가서 전쟁하는 능력과 물마시는 습관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과 엎드려서 물을 마셨다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색약과 공무원 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또 물마시는 습관이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왜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누가 전쟁에 나갈 것인지, 누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될 것인지의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시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물마시는 습관과 군인으로서의 정신자세를 연결시켜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스럽지는 못해요.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는 것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않고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철퍼덕 엎드려서 물을 마셨다는 것은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손으로 땅을 짚고 경계하는 마음도 없이 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죠. 그러나 여기서 보면 그런 뜻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뜻으로 이들을 시험하신 것은 아닙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만약 엎드려서 물을 마신 사람이 300명이었고, 손으로 떠서 마신 사람이 9,700명이었다면, 엎드려 물을 마신 사람들이 선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또 신학자들은 엎드려서 물 마신 것을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서 그것이 잘한 것이라고 짜맞추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불만을 터뜨렸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소한 문제로 중요한 결정을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우리에게는 사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큰 교회의 목사님은 부교역자를 초빙할 때, 먼저 운전을 시켜본답니다. 설교 시켜보고, 또는 영향력있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서 사역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운전 시켜보고 뽑는다는 거예요. 운전하는 습관과 목사가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운전하는 습관과 목사가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이 과연 아무런 상관도 없을까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우리의 인격과 정신을 나타내주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우리의 본심을 더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무심결에 아무런 가식없이 나오는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행해지는 중요한 행동들은 사실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목에 힘주고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 없이 하는 아름다운 말들에는 하나님이 관심이 없으세요. 오히려 하나님은 뒷골목 지날 때의 우리의 모습, 집에서 우리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 물을 마시는 것처럼, 운전을 하는 것처럼, 평소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그래서 가식을 가미해야 할 필요가 없는 그런 행동에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를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룬 커다란 업적으로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평가가 무엇보다도 정확하지 않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이 평가에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벌써 말씀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고 모든 사소한 일에까지 가식으로 살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사소한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살게 될 때,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아무런 가식없이 성실하고 깨끗하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심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사소한 행동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평가될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사소한 일에서의 성실한 삶으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는 영광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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