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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 많은 놀부보다 가난한 흥부가 되어야 하는 이유 (에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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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놀부보다 가난한 흥부가 되어야 하는 이유 (에 8:1-2)

흥부와 놀부는 형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오장육부가 있는데 놀부는 오장칠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왼쪽 갈비 아래 심술보가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놀부가 하는 짓을 보면 똥싸는 아이 주저앉히기, 초상집에 가서 노래 부르기, 열리는 호박 넝쿨 끊기, 가뭄에 남의 논 물꼬 빼기, 남의 노적가리 불 지르기,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 등등 아주 못된 짓만 골라 하는 것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흥부는 굶어서 죽을 사람 먹던 밥이라도 덜어주고, 얼어서 병든 사람 입었던 옷 벗어주기, 노인이 짊어진 짐 자청하여 져다 주고, 장마 때 큰 물가에 삯 안 받고 건네주기, 남의 집에 불이 나면 세간 지켜주고, 길 잃은 아이 부모 찾아주는 등 착한 일만 찾아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부는 부모님의 재산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동생인 흥부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고 엄동설한에 밖으로 쫓아냅니다. 굶다가 굶다가 다른 방도가 없어서 곡식이라도 좀 얻어보려고 다시 찾아온 흥부를 놀부는 몽둥이로 때려서 쫓아내지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놀부의 악행에 분노하고 흥부의 고난을 슬퍼합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어 큰 부자가 됩니다. 그 얘기를 들은 놀부는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분질렀다가 다시 묶어주는데, 그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었다가 된통 재앙을 당합니다.

자, 이런 이야기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런 이야기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 권력으로 백성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나 가난한 사람들 등쳐먹는 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힘없는 백성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이 당할 수밖에 없지요. 현실에서는 그렇게 당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 속에서 놀부와 같은 악인들을 징벌함으로써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인 복수는 아니지만 이야기 속의 가상적인 복수를 통해서 억울함과 분노가 해소되는 것이지요. 그런 가상적인 복수마저 할 수 없다면 힘없는 백성들은 살아갈 희망도 없고 아무런 낙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의 기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또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비록 현실에서는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지만, 궁극적인 가치판단에 따라 악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보상을 받게 된다는 교훈으로 백성들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 에스더 이야기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에스더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고 또 그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저주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세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많은 고난과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400년 동안이나 노예살이를 해야 했고,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의 민족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당하면서 고난의 역사를 써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망하면서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가 살아야 했습니다. 이 에스더 사건에서는 페르시아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유다인이 몰살을 당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면서 낙심하고 슬퍼하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전달하시려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그들과의 언약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겠지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유난히도 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면,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호 속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그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고 계십니다. 이 에스더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세밀하게 그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지 잘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만을 처형한 아하수에로는 하만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몰수해서 에스더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그동안 고통을 당했던 왕비에게 일종의 사과의 표현임과 동시에 보상인 것입니다. 사과에는 보상이 뒤따라야 해요. 손해를 끼쳤으면 그만큼 메꿔준다는 의식(ceremony)이 필요한 것입니다.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정부에 죽어라고 보상을 요구하는 이유가 뭡니까? 돈 받아내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정당한 보상을 해야 그것이 사과의 객관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섭섭하게 했거나 잘못을 했으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사과의 표현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로만 때우지 말고 진심을 담은 선물로 보상을 하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상은 고사하고 말도 잘 못해요. ‘그걸 꼭 말로 해야 되나?’ 이런 식이지요. 특히 경상도 남자들은 그게 트레이드마크지요? 저는 경상도 남자 아니라도 잘 못합니다만. 그러나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단단히 마음을 먹었어도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언제든지 취소를 할 수가 있거든요. 우리는 미안해도 미안하단 말을 못하고, 고마워도 고맙다는 말을 잘 못해요. 특히 부부간에는 더 그렇지요? 물론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그러다가 헛다리짚는 경우도 많거든요. 건강한 가정과 상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만이 그 재산을 어떻게 모았는지 모릅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있을 것이고 못된 방법으로 축재한 것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은 모든 재산이 에스더에게 돌아갔고, 다시 모르드개에게 주어졌다는 것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 13:22)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들어맞았지 않습니까?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 다른 사람을 등쳐서 얻은 재물은 결코 우리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 있다면, 그 부분은 반드시 하나님이 뺏어 가실 것입니다.

이제 에스더는 왕에게 모르드개를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이때는 에스더가 왕비가 된 지 벌써 8년이 지났는데, 그리고 모르드개는 이미 상당한 고위관직에 있었는데, 모르드개와 왕비의 관계를 왕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주 들어왔던 단어 가운데 하나가 측근비리, 친척비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권력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자와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좋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자신이 딸처럼 키운 에스더가 왕비가 된 지 8년이 지나도록 왕비와의 관계를 자신의 출세나 축재에 이용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왕도 몰랐고 하만도 그 사실을 몰랐었지 않습니까? 그만큼 모르드개는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지 몰라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는 짓이 별로 존경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산다면, 고난당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테마를 우리에게 적용하기가 상당히 곤란하겠지요?

왕은 모르드개가 왕비를 딸처럼 키운 사촌오빠라는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르드개는 왕의 목숨을 구한 충신이었고 그래서 왕이 존귀하게 하려고 생각중이었는데, 마침 그가 자신의 처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갑겠어요? 그래서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줍니다. 모르드개를 아는 사람들은 그동안 모르드개를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비를 딸처럼 키운 사촌오빠라는 그 관계를 왕에게 말하면 더 큰 지위와 권력을 얻을 것이 분명한데 무슨 고집인지 그것을 8년 동안이나 비밀에 붙이고 있었으니 얼마나 꽉 막힌 사람입니까? 그러나 이 사실이 왕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 않겠어요?

우리는 뭐 하나 착한 일을 했거나 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지 못해서 안달이 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비밀을 하나쯤 간직하고 사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 착한 일을 하고 그것을 비밀로 간직해 보세요. 처음에는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종종 그런 기사를 대할 때가 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말단 공무원이 아무도 몰래 무의탁 노인들 돕는 일을 지난 10년간 해 왔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알려져서 신문에 나왔다거나, 또는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한 선생님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뭉클하지요? 그런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는 그들이 자랑하거나 떠벌이지 않고 조용히 몰래 선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것을 떠벌이면 아무도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수해 주신 비법 아닙니까? 그래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갚으신다는 거예요. 이제부터 우리가 착한 일을 한다면 그것을 비밀로 간직하도록 합시다. 그런 비밀은 얼마든지 많아도 좋습니다.

지금까지 하만이 누리던 지위와 권력이 이제 모르드개에게 주어졌습니다. 의인은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받는다는 규칙이 시행되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러나 모르드개처럼 보상을 받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스데반과 같은 의인도 있습니다. 다윗의 신하였던 우리야도 무척 충실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아내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법칙이 무의미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법칙은 결코 깨뜨려질 수 없고 무시되지도 않습니다. 만약 어떤 의인이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늘에서 더 큰 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에스더의 이야기가 수천 년 전에 페르시아 제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끝난다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유다인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의인들을 구원하시고 상 주신다는 하나님의 법칙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에스더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재현되고 체험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동일하게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구원하심의 위로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날마다 체험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늘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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