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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에 08: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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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에 8:9-17)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압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내 모습이 어떤 것인지 대체로 알지 않습니까? 또 다른 사람들도 나에 대해서 압니다. 내가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격은 어떤지 대략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모르는 부분이 나에게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알지요. 가령 내가 밤잠이 없는 대신 아침잠이 많다는 것은 아는 사람도 있고 또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내가 드러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자신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나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부분이 많겠지요. 반면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비밀 같은 것 같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부분이 별로 없을 거예요.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은둔생활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그 부분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다른 사람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부분은 없을까요? 그런 경우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째려보는 버릇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상대방이 아주 싫어하겠지요? 그런데 나는 그걸 몰라요. 모르니까 고치지 않고 계속 그렇게 합니다. 나의 모습 가운데 남들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아주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부분 역시 최소한으로 줄여야 우리가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이 부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비판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이 부분이 클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리 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듣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판을 싫어하면 자기 발전이 있을 수가 없어요. 건전한 비판이야말로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비판을 수용하고 개선하는 것이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이나 단체의 차원에서는 외부의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집단 이기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혈연으로 집단이 형성되기도 하고 학연이나 지연에 의한 집단 역시 매우 강한 결속력을 갖는 이익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기독교도 하나의 이익단체입니까? 기독교가 이익단체가 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종종 기독교가 이익단체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지지를 보낸다면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무조건 지지하는 것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또 기독교는 외부의 비판에 매우 부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가 외부의 비판에 부정적으로 대치하게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종교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믿음을 지켜야 하고 또 그에 대항하는 논리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교가 그 믿음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버린다면 그 종교 자체가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역시 외부의 공격에 대해 부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체질화되어서 모든 외부의 비판에 부정적이 되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일입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교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기독교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고, 교회의 실책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비판에 자동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한다면 잘못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에 따라 모르드개가 조서를 쓰는데, 그 내용은 원래 하만이 쓴 조서에 따라 12월 13일에 누구든지 유다인을 학살하게 된 것으로부터 유다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그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은 첫째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각자 집에 머물러 있다가는 봉변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한데 모여서 힘을 모으고 또 대피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저희를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인데, 비록 유다인들이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지만 저희를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까지 죽이고 도륙하도록 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당방위라 한들 그 행위가 잔혹하다면 그들을 학살하려고 했던 원수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크게 낫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런 조서를 쓴 모르드개는 도덕적인 사람이고 의인인가 하는 의문과 비판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요?

여기서 우리의 태도는 무조건 부인하고 그러한 비판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인정하고 고치자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이라면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의 생각보다 뛰어나신 뜻을 가지고 계시는 절대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몰라서 이해가 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와 의지의 대상입니다. 비판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모르드개나 유다인의 행위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모르드개가 그런 잔혹한 명령을 내리고 유다인들이 그렇게 따랐다면 그들은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또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해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 일단 그렇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즉 매 맞을 각오를 하고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우선 모르드개가 쓴 조서의 내용 중 11절은 하만이 쓴 조서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3장 13절에 보면 하만이 쓴 조서는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11절에서 모르드개가 쓴 조서는 ‘저희를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라’고 합니다. 지금 모르드개가 조서를 쓰는 것은 하만의 조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한 언어로 쓰여진 하만의 조서를 부드러운 말로 무력화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모르드개가 진짜로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든 그의 조서는 강경한 어조로 쓰여질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을 우선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진짜로 모르드개는 유다인들로 하여금 그 대적들의 처자까지 죽이라고 명령한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좀 무리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가 쓴 조서에는 그렇게 대적을 죽이고 그 재산까지 탈취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나서 유다인들이 대적들을 죽였을 때 그 재산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처자까지 죽였다는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외적으로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다는 내용이 있지만, 에스더가 그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도록 왕에게 요청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하만과 관련된 특별하고 상징적인 케이스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모르드개가 강경한 언어를 사용해서 조서를 썼지만, 처자를 죽이고 재산까지 탈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최소한의 복수, 혹은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르드개가 의도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모르드개가 정말로 대적의 처자까지 죽이고 재산을 탈취할 의도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났을 테니까요.

그래서 NIV 성경은 이 부분을 매우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처자는 대적들의 처자가 아니라 유다인들의 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각 도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저희와 그 처자를 치려 하는 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가 되는 것입니다.

조서의 문구가 좀 논란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발생했던 결과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모르드개에 대한 평판을 보면 모르드개가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조복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왕의 앞에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고 기뻐했다고 했거든요. 잠언 11장 10절에 보면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고 했습니다. 악인 하만이 패망하고 의인 모르드개가 형통한 것을 보고 온 성읍이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은 또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웠겠습니까?

서울시장이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했다고 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지금 서울시장은 매우 믿음이 좋은 분입니다. 정말 그분의 믿음대로 서울시가 하나님께 드려져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가 되고 서울시민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인이 시장이 된다고 서울시가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습니까? 서울시장 선거가 각 종교간에 서울시를 따먹기 위한 다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믿음 좋은 장로님이 시장이 되었다고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면, 다음 시장에 불교신자가 당선되면 서울시는 하나님께 드렸던 것 취소하고 다시 부처님께 바쳐져야 하는 건가요? 그분의 믿음이나 열정은 좋지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욕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사건을 보고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뻐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기독교에 아주 큰 손해가 되는 일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 안티 기독교 세력이 날뛰는데 얼마나 좋은 빌미를 제공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 서울시장이라는 정치적 권력을 부정직하게 이용했다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행사를 주최한 측에서는 2007년에는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했다는데, 그렇게 빤히 속 보이는 짓으로 서울시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 수 있을까요?

모르드개가 재상이 되자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유다인이 되었습니다. 인종 자체를 바꿨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바꿨다는 말이지요. 그들이 보았던 것은 악인이 망하고 의인이 구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다인들이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받는 것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드개 같은 의인이 섬기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서울시장이 그의 믿음과 의로움으로 시정을 잘 이끌어가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수산 성을 하나님께 봉헌하거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해서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유다인이 되겠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지요.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이라크에서 피살당한 김선일 씨가 마지막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소리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예수 믿으라고 외치다가 죽었어야 한다면서 아주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시는 말씀을 하셔서 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분의 열정도 이해가 됩니다만, 열정이 지나치면 다른 사람들과의 시각차가 커지게 되고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교계의 지도자가 되시는 분들은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을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변론하고 싸워야 하지만,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리의 잘못이나 기독교인들의 실수에 대한 비판에는 우리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또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하지만, 명백한 잘못을 감싸고 돌 수만도 없습니다. 오히려 비판을 겸손하게 수용하면서 자기발전의 계기로 삼는 넉넉함과 성숙함이 우리에게 더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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