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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스더는 피에 굶주린 왕비? (에 0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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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는 피에 굶주린 왕비? (에 9:11-19)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애로사항 가운데 하나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라는 것이 마치 찢어진 그림의 한 조각과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입장과 시각의 차이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 얼마든지 다르게 파악될 수 있는데,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과거의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에서는 사실의 정확한 재현보다 사실의 해석과 의미에 더 중점을 두고 접근하게 됩니다.

여기 에스더의 이야기에서도 조각 하나로 그림 전체를 재구성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이라든가 당시의 관습과 문화, 사건의 전후 문맥 등을 잘 살피지 않으면 크게 오해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지요. 특히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부분은 그런 위험을 더 안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언급된 내용만 간추려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페르시아의 수도 수산에서 유다인들이 500명을 죽였고 또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왕비 에스더는 왕에게 하루 더 원수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만의 아들들을 나무에 매달게 해 달라고 하지요. 그래서 그 다음날에는 유다인들이 300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것을 즐거워하며 잔치를 벌였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사실의 언급만을 가지고 본다면, 왕비 에스더는 피에 굶주린 여인처럼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500명을 죽인 것이 모자라 하루 더 살육을 하겠다고 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유다인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잔인무도한 사람들처럼 그려질 수가 있겠지요. 하루에 500명씩, 300명씩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무자비한 폭도처럼 생각될 수도 있잖아요? 거기다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학살해 놓고 좋다고 잔치를 베풀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금방 얘기한 것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내용입니다. 전후 문맥과 당시의 현장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본다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다는 것을 봅시다. 당장 이 얘기만 들으면 나쁜 것은 하만이지 그 아들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죽였느냐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열 명의 아들들을 죽였다니까 그 중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항할 힘도 없는 하만의 어린 아들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죽임을 당한 것처럼 생각을 몰고 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만의 아들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정보를 갖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선입관을 가지고 마치 그들을 죽인 것이 비인간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아들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직적으로 유다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백성들에게 마음껏 유다인들을 죽일 수 있는 살인면허가 주어진 그날, 특히 하만의 열 아들들은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그들은 유다인의 대적의 선봉 또는 지도자가 되어서 유다인들을 죽이는 데 앞장서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아버지에 못지않게 악랄하게 유다인의 원수 노릇을 했을 것이 뻔합니다. 에스더가 그들을 나무에 매달도록 왕에게 요청했던 것을 보면, 그들이 하만의 아들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들 역시 악랄한 원수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이 마치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을 죽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큰 오해입니까?

또 수도 수산에서 500명을 죽였다는 것은 유다인들이 일방적으로 원수들을 죽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 역시 합법적으로 유다인들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에 두 세력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유다인들은 왜 하나도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누가 하나도 죽지 않았다고 했지요? 이 본문은 단지 대적들이 죽은 숫자만을 말하고 있을 뿐, 유다인들이 희생된 수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다인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또 죽었다면 얼마나 죽었는지 우리는 몰라요. 유다인들이 아주 철저하게 대비를 해서 한 사람도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러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유다인들 역시 적지 않은 희생을 당했을 거예요. 어쨌든 왜 본문은 유다인의 희생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것이 승리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적으로 몰살을 당하게 되었던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구원을 얻고 오히려 원수들을 제압하게 된 승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원수들을 죽인 숫자가 중요하게 기록되었고, 혹시 있었을지도 모르는 희생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유다인들이 일방적으로 원수들을 학살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본문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에스더는 왜 그 다음날까지 원수들을 죽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을까요? 역사에 보면 왕비나 여왕들 가운데 아주 잔인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별명이 피의 메리가 될 만큼 잔혹하게 신교도들을 탄압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세벨 역시 잔인한 왕비였지요. 또 그 딸 아달랴는 유다의 왕비가 되었다가 왕족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자신이 왕이 되기도 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를 보아도 에스더가 그런 잔인한 왕비였다는 단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민족을 구하려는 의지와 믿음이 있었고, 또 원수 하만을 제거했던 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혜 있는 여자였지만, 대단한 여장부였다거나 성격이 화끈했던 그런 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하루 더 원수들을 죽일 수 있도록 부탁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또 이것은 에스더 개인적인 판단이라기보다 유다인 공동체의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까닭없는 질시와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영국에 가면 런던 남서쪽 뉴몰든이라는 지역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삽니다. LA에 코리아타운이 있는 것처럼 런던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데 모여 살게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더 타임스에 한국인들이 뉴몰든에 모여 사는 것은 개고기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이 런던의 개들을 뜯어먹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한국인과 한국 음식을 비하하는 내용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영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무슨 죽을죄를 지었습니까? 왜 그렇게 악의적으로 한국 사람들을 공격하는 걸까요?
이것이 단순히 일회성의 기사나 칼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신문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 사람에 대한 집단적인 혐오감을 갖도록 만든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에 대한 증오범죄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왜 LA에 폭동이 났을 때 한국 상점들이 주로 약탈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문제는 한국인이 소수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수민족으로서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잘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맨날 사고나 일으키고 산다면 키위들이 우리를 얼마나 싫어하겠어요? 그러면 반대로 우리가 하는 일마다 크게 성공하고 학교에서도 우리 아이들이 1등을 휩쓴다면 키위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우리를 존중하고 잘 해줄 것 같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질시와 견제가 크게 작용할 것입니다. 우리가 외부인이고 소수이기 때문에 그런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에 살던 유다인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지금도 유태인이라면 세계가 알아주는 사람들 아닙니까? 모르긴 하지만 페르시아에서도 유다인들이 크게 성공하거나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본국인들의 눈에 가시처럼 보였을 거란 말이지요. 도대체 런던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유력 일간지가 그렇게 악한 의도로 칼럼을 게재했겠어요? 이유 없는 적개심과 증오가 죄없는 소수민족에게 투사되는 것이지요. 하물며 본국인들보다 더 잘 사는 유다인들은 얼마나 증오의 대상이 되었겠어요?

12월 13일에 유다인들이 원수들을 500명이나 죽였지만, 위험요소를 충분히 제거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수도인 수산에는 특히 하만의 추종자들이 많았을 거란 말이지요. 이 기회에 그 세력을 뿌리 뽑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왕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 아니겠어요? 물론 14일의 전투는 또 전날의 전투와 달랐을 것입니다. 13일에는 양쪽이 모두 합법적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었지만, 14일에는 유다인들만 합법적으로 원수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에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겠지요.

만약 런던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더 타임스에 대항해서 자구책을 마련하다가 그 신문사를 통째로 사버렸다면 얼마나 통쾌한 일이겠습니까? 원수들의 손에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유다인들이 오히려 원수들을 죽이게 되었다는 것은 런던의 한국인들이 더 타임스를 인수했다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수단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이 원수들을 제압한 다음 날 함께 모여 잔치를 열고 기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원수들을 죽였다는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았고, 그 원수들이 멸망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준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오늘 우리가 고난과 시험을 당해도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한 세상은 의인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인을 구원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악인들과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도 담대하고 힘 있게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언제든지 우리는 당당하고 거리낄 것 없이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과 이러한 삶의 태도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즉 우리의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 또는 이웃이나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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