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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을 허는 여우 (아 0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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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온 김 집사가 사흘 밤, 낮을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흘 째 되는 날 아침에 기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김 집사는 두리번거리다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여기가 어딘가? 드디어 내가 천국에 온 것이 아닌가?” 옆에서 남편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던 아내 박 집사는 반가워서 남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여보,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군요. 여기는 병원이에요, 병원.” 그러자 김 집사는 놀란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습니다. “천국에 온 줄 알았더니 아직 내가 지옥에 있구먼.”

이 예화에 나오는 김 집사의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잠언21:9)는 잠언의 말씀도 있듯이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그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그 원인이 아내에게 있었던지, 남편에게 있었던지, 또는 둘 다에게 있었던지 모르겠으나 김 집사의 가정은 참으로 불행한 가정이었습니다.

이런 가정들이 우리나라에는 상상 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예로서 최근에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가정 붕괴 현상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현재 30%를 넘어서고 있는 가정 붕괴는 겉으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여기에다 실제로 붕괴하기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을 감안한다면 문제가 있는 가정의 숫자는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게 됩니다. 행복해야 될 가정이 이렇게 되고 있음을 볼 때 가정 제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가슴을 치고 계실 것입니다.

당초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후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셔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함께 한 몸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의 의도대로 선물을 잘 사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정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파괴되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가정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정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가정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가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주일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하고, 또 잘 한 것이 있으면 더욱 노력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 모 신문사에서 한국인의 의식 구조에 대해 앙케이트를 실시인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당신이 평소에 늘 생각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건강과 가정”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인간의 머리 속에는 하루에 수 천 가지의 생각들이 떠 올랐다가 살아지지만 그 중에 가장 많은 떠 오르는 것은 자신과 가정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정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인 본능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결혼을 하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자기 가정에 최우선을 두고 살려고 합니다. 결혼 전에는 부모나 형제를 더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아내나 자식을 더 생각합니다. 부모님들이 들으시면 섭섭할런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창조 질서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 형제, 자매를 떠나 따로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또 그렇게 해야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새롭게 결혼한 가정에 부모나 형제나 자매 등 다른 요소가 개입이 되게 되면 그만큼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데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같이 살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에 비해서 그들은 그 만큼 손해를 보고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천국의 기쁨을 맞보게 하셨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이 땅에서 누리고 사는 작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하늘의 천국을 맛보고 살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이어야 할 가정이 천국이 되지 못하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됩니다. 아까 예화의 등장 인물이었던 김 집사도 자기 가정이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가 소년 시절에 감동 깊게 읽었던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읽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네델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살았던 한 소년의 용감하고 희생적인 사건을 주제로 한 내용입니다. 네델란드라는 나라는 국토의 상당한 부분이 바다의 수면보다 낮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에 뚝을 쌓아 바닷물이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뚝을 쌓은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소년은 해가 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다 무심코 제방 뚝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뚝에 조그만 틈이 생겨 바닷물이 조금씩 새 나오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틈은 조금 더 커져서 손가락 굵기가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그냥 두면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구멍은 점점 더 켜져서 나중에는 뚝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닷물이 삽시간에 밀려 들어와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은 물바다가 될 것이고 수많은 인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소년은 큰 일 났다고 생각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부근에는 사람이 없어 듣지 못했습니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이에 구멍은 더 커졌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소년은 자기 팔뚝을 구멍에 집어넣었습니다. 세차게 흘러나오던 물이 멈추었습니다. 구멍을 막았던 팔뚝은 찬 바닷물로 인해 져려왔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팔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밤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팔을 빼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그런 상태에서 밤을 세웠습니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느 농부가 밭에 가다가 이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데리고 와 그 구멍을 막았습니다. 소년의 팔은 장시간 차가운 바닷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비록 팔을 잃었지만 그의 희생은 온 마을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소년이 뚝에 생긴 조금만 틈을 처음부터 막지를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겠습니까? 틈은 점점 더 커져서 구멍이 되고, 구멍은 더 커져서 나중에는 제방이 무너지기 됩니다. 그 때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물을 막으려고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조그만 구멍은 쉽게 막을 수 있어도 큰 구멍은 막기가 어렵습니다. 시냇물의 물줄기는 그 방향을 쉬게 잡을 수 있어도 이미 큰 강을 이룬 큰 물줄기는 잡기가 어려운 것이나 같은 이치입니다.

저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의 가정의 문제도 이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틈도 조그마할 때 막아야지 그것이 커지면 막을 수 없습니다. 가정의 문제가 작을 때는 쉽게 해결을 할 수 있지만 문제가 커지게 되면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이 잘 안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는 문제를 초기에 해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되겠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다가는 문제가 커져서 나중에는 다룰 수 없는 큰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나라’(잠언2:15). 포도원에 있는 포도 나무에 이제 꽃이 피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여우가 와서 포도원을 헐며 포도 나무에 핀 꽃이 떨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포도 나무가 망가지고 포도가 열리지 않게 되니 그 여우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광야에는 여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우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사기 15장 이하에 보면 삼손이 여우를 잡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손은 원수 불레셋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여우 3백 마리를 잡고 꼬리를 붙잡아 맸습니다. 그리고 여우 꼬리에다 횃불을 달고 불레셋 사람들의 밭으로 내 몰았습니다. 꼬리에 불을 단 여우들은 불레셋 사람들의 밭에 뛰어 다니면서 곡식과 감람원을 다 불살랐습니다.

여우는 이스라엘에서 포도 농사를 해치는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돌아다니면서 땅을 파고, 구덩이를 만들며, 뿌리를 갉아 먹고, 줄기를 뜯어 먹는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맹렬히 활동하는 시기가 바로 포도 나무에 꽃이 피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꽃이 피는 시기에 여우를 잡지 못하면 포도원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사랑의 꽃을 피우는 계절인 포도 꽃과 석류 꽃이 피는 시기에 여우들은 돌아다니면서 포도원을 허는 일을 합니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사랑의 꽃을 피우고 가정을 세우는 때에 여우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여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우가 포도원을 해치는 적인 것처럼 가정을 해치는 상징으로서 여우를 등장시켰습니다.

본문이 쓰여진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시입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의 관계, 사랑의 보금자리를 여기서 포도원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깊은 사랑에 빠져 있던 두 사람은 어느날 그들의 관계 속에서 위기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보금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허는 여우를 잡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포도원을 헐며 포도 나무를 망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작은 여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큰 짐승이 아닙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고 여러 마리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여우’라고 했지만 원본에는 “여우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작은 여우들이 와서 포도원을 헐고 있습니다. 작다고 섣불리 보고 그냥 내버려 두다가는 온 포도원을 다 망치게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가정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을 보면 큰 사건이 아닙니다.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사건들입니다. 이 작은 사건들이 가정을 행복하지 못하게 하고 붕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포도원을 허는 것이 작은 여우들인 것처럼 우리 가정을 파괴시키는 것이 작은 일들입니다. 큰 일들은 눈에 금방 띠어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은 눈에 잘 띠지 않아 무심코 그냥 지날 수 있습니다.

대형 점보 젯트 여객기가 수백 명을 싫고 가다 떨어지는 경우를 보면 대개 큰 원인이 아닙니다. 작은 나사가 빠졌다거나 조그만 계측 기기가 고장 났다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또 미국에서는 대화제로 생겨나는 피해보다 작은 흰개미가 주는 피해가 더 큽니다. 터마이트라고 하는 이 개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이 개미들이 돌아다니면서 농작물을 망치게 한다든지 집의 나무를 갉아 먹어 허물어지게 합니다. 큰 문제들은 눈에 쉽게 띠어 사전에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작은 문제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 작은 것들이 커져서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큰 문제로 발전합니다.

그러면 가정이라는 포도원에서 몰아내야 할 작은 여우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무관심이라는 여우입니다. 겪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내가 무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가정을 떠나서 밖에서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과 남편들과 아내들을 붙잡고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먹을 밥이 없어서 그런다고 말합니까? 누워 잘 침대가 없어서 그런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무관심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관심을 갖게 됩니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랑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어디에선가 그 부족한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관심입니다.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을 아름답구나.’ 역시 관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관심이 없어질 때 그 가정은 붕괴를 시작하고 있다는 경고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서로 각자에게 이런 관심이 풍성할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나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남편이 나에게, 아내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또 엄마, 아빠가 나에게, 내가 엄마, 아빠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갖고 있다면 어떤 관심입니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은밀한 곳에 숨어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세세한 부분까지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이런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다시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몰아내야 할 작은 여우는 고독감입니다. 고독은 언제 느낍니까? 고독은 내가 아무에게도 속하여 있지 않다는 데서 옵니다. 세상 천지에 나 혼자 있다는 생각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감을 느끼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홀로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그 분들은 정말로 고독한 분들이십니다.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독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고독을 느끼고 산다고 합니다. 생활이 복잡하고 바쁘다 보니 가족과 대화의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가정은 마치 여인숙처럼 밥 먹고 잠자는 곳이 됩니다. 한 지붕 밑에서 살아도 남남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정의 본래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비극입니다.

“취미가 뭡니까?” “예, 저는 고독을 좋아해요.”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처녀들에게서 듣던 말입니다. 감상적일 때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이 취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고독을 즐기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사단의 시험에 빠지기가 십상입니다. 사람이 고독하게 지내다 보면 생각이 좁아지게 됩니다. 혼자의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다 보니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타협을 모르는 편협한 사람이 될 수 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고독하게 지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가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신 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시편68:6)라고 하였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처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통해 고독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데도 고독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부부가 서로 속하여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서로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함께 산다고 해도 각자 따로 놀면 고독하게 됩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도 있듯이 주위에 사람이 있다고 고독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면 소속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여기서 ‘속하여 있다’는 말은 소유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소유되어 있을 때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이 때 나는 가정의 일원이 되어 서로를 공유하고 살기 때문에 고독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이 고독이라는 작은 여우를 내 쫓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몰아내야 할 작은 여우는 열등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은 자신에 대해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어 사는 비둘기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비둘기는 온순하고 겁이 많기 때문에 바위 틈 같은 은밀한 곳에 집을 짖고 삽니다. 자신이 연약한 존재여서 다른 동물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쉬우므로 비둘기는 숨어 삽니다. 그리고 웬만한 일이 아니면 자신을 노출시키지 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외모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피부가 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흰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피부가 비록 검지만 아름답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가서1:5).

계달은 아라비아 유목민, 즉 베두인 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의 장막은 염소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검은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술라미 여인이 자기를 계달의 장막과 같다고 한 것은 피부가 검다는 것을 비유로 한 말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열등감을 덮기 위해서 계속해서 변호합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피부가 거무스름할지라고 흘겨 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니라’(아가1:6).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을 가지고 괴로워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자기의 외모 때문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태어난 가문이 별로 좋지 못하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져본 적이 없으셨습니까?

그러나 그런 열등감을 가지기 마시기 바랍니다. 시편 139편 1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신묘막측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이한 방법으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나의 외모가 어떻게 생겼던 간에, 어떤 부모, 어떤 가문, 어떤 환경에서 태어 났던 간에 나는 하나님의 실수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하나님의 걸작품 중에 하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남과는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특성을 잘 살릴 때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매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과거 열등감이란 말 대신에 자격지심이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그리고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할 때 불필요한 자신을 방어합니다. 자기의 약점을 들어내지 않기 위해 과잉 반응을 합니다. 자기를 보호하다 보니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헐 뜯습니다. 중상 모략을 합니다. 이것은 다 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열등감 때문입니다. 이런 의식에 사로 잡혀 있으면 인간 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조그만 일에도 공격적이 됩니다. 이런 부부, 이런 자녀, 이런 가정은 원만하지 못하며 불화가 잦습니다.

그러므로 이 열등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둘기와 같이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어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의기 소침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나는 나입니다. 나 외에는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창조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슴과 어깨를 피십시오. 당당하게 세상을 사십시오. 그리고 자신감과 긍정적인 생각을 가시시고 사십시오. 그래서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미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본문은 ‘우리를 위하여’라고 시작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여기서는 ‘잡으라’라는 명령어로 되어 있지만 본래의 의미는 “잡읍시다” 또는 “잡자”입니다. 즉 우리를 위하여, 다시 말하면 “우리 가정을 위하여 가정을 허는 작은 여우들을 잡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두를 위해서 입니다. 작은 문제가 더 커져서 가정이라는 행복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전, 아직 그것들이 작을 때 해결하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평안하기를 바라십니까? 작은 여우들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무관심이란 작은 여우, 고독이라는 작은 여우, 그리고 열등감이란 작은 여우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크지 않고 작아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냥 지나치게 되면 나중에는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 아직 작아서 내가 손 쉽게 잡을 수 있을 때 내 포도원을 허는 여우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당초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과 같이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과 저의 가정에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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