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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을 선으로 이기는 생활 (잠 25: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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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1978년 새해 첫 번 삼일 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우리 말씀을 듣기 전에 새해 첫 기도회 시간인데 우리 다 함께 목소리를 같이 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기도하실 때 이 몇 가지를 기억하시고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아마 금년 일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 크게 문제된 것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 하나는 미군 철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미군 철수를 반대했다고 해도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이 있기 때문에 금년에는 우선 6천명 정도가 철수할 것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미국 사람들이 좋아서 우리 나라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없이 덤벼드는 북한 괴뢰군의 만행을 저지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무엇이고 다 상관하지 아니하고 한국에서 손을 떼겠다는 그들에게 무엇을 더 기대하겠습니까? 물론 미국의 정부 당국자는 그런 이야기를 절대로 안하지만 어디서부터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만나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박정권이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 미국은 결코 한국을 군사적으로 계속 지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는 것은 독재 정권 유지에 후원하는 결과밖에 아니라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행해지는 처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고자 하지 아니합니다. 사람이란 그런 것입니다. 오늘까지 가깝다가도 자기들에게 유익이 없으면 언제라도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상징입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세상에서는 가장 강하게 여기고 의지하려 할 때 “갈대 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언젠들 그리하지 아니하리오마는 오늘 이 때야말로 사람을 의지하던 우리, 미국을 바라보던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부르라 하십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정말입니다. 미국이 한국에서 손을 뗀다고 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한국이 건재해 있다는 사실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먼저 이 나라를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다른 하나는, 금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 큰 일이 공의에 근거해서 바로 잘 치러졌으면 합니다. 요사이는 방학을 했기 때문에 조용하게 지내지만 이제 개학이 되면 학원 가에서는 지금처럼 조용하리라 생각되지 아니합니다. 이것을 미리 내다본 당국에서는 어떤 희생이 다소 있더라도 강력하게 저지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상관하지 아니합니다. 민주국가에서는 누구나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한가지 바라는 것은 4.19대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혼란과 희생은 다시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고기는 거센 물결을 헤치고 올라갑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금년에 무슨 간절한 소원이 있으시면 그 제목을 들어서 하나님께 자세하게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하게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면서 간구하세요.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세요. 의심하면서 하는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람에 밀려가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한 10분 동안 시간을 드릴 테니까 한 분도 그냥 가시지 마시고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소리를 크게 내면서 기도해도 상관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오늘 주신 말씀을 좀 생각합시다. 본문 16절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꿀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몸에 얼마나 유익을 주는 식물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족하리만큼만 먹으라고 왜냐하면 과식하면, 아무리 좋은 꿀이라도 지나치면 토하게 되는 손해를 면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나 적당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는 감정적 즐거움이 건전하고 적당한 범위 안에서 허용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꿀같이 단 것을 만났을 때 이와 같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도 우리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것을 먹으며 즐길 것입니다. 그러나 족하리만큼 먹어야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먹으면 손해가 됩니다. 가장 맛난 것을 먹을 때 과식할 우려가 큽니다. 그러므로 절제가 필요합니다. 먹는 것 뿐만 아닙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친구가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심이 필요하다고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친구가 없이 사는 것처럼 쓸쓸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까운 친구끼리라도 지켜야 할 예의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부족할 때 야비해지기 쉽고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 종래는 친구 사이에 금이 가게 마련입니다.

라틴 격언에 “생선과 친구는 3일째가 되면 싫어진다”(Post tres soepe dies piscis vilescit et hospes)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와도 너무 친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사람은 다 부족하기 때문에 너무 친하다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너무 잘 알게 되어서 그럽니다.

요한 복음 2장 24-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 말씀의 뜻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깊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예수님을 배반해도 조금도 놀라시거나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그럴 것을 미리 다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너무 가까이 하다가 낙심합니다. 사람을 너무 의지하다가 실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은 어떻습니까? 그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친구입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주님을 배반하는 때 있어도 주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합니다.

(454장 찬송)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수라
예수 내 친구 오직 내 사랑
온 천지가 변해도 주 날 버리잖네

여러분! 금년 일년 사람 가까이 하다 낙심하지 마시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주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가까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주님께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대접을 받습니다. 내일 모레 금요일 밤에 모이는 철야 기도회에 많이 나오세요. 정말 좋습니다. 세상에서 주님 가까이 하는 것 이상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 21,22절을 보십시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아무리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우리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과 우리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었을 뿐 아니라 옛 계명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그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 몸소 큰 본을 보이시고 새로 그 계명을 주시면서 실행하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이미 구약의 계명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9-21절에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 도덕은 약자의 도덕이요, 노예 도덕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6장 35절에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하였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고, 나를 돌봐주는 사람 돌봐주고, 나를 위해주는 이 위해주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 아껴주기는 쉽지만 나를 미워하는 사람 사랑하기란 어렵습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 축복하기는 힘이 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럴 때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신데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를 들으세요.

“아버지여, 저희들을 용서하옵소서 저희들이 지금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 이 말씀은 원수와 다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얼마나 묘한 표현인지 모르겠어요. 의인은 악인과 다투면 악인이 이기지요. 그러나 분명히 들으세요, 의인이 악인 앞에 일시로 굴복하는 것은 우물물을 잠시 흐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나쁜 사람이 우물에 와서 막대기로 휘저어 놓으면 잠시 그 맑던 물이 흙물처럼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곧 맑아집니다. 샘이 계속 솟아나기 때문에 곧 깨끗해집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잠시 굴복하는 것이 완전한 실패인 줄 압니까? 결국은 승리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나한테 악하게 그럽니다. 그러나 내가 대답하지도 않고 대항하지 않으면 그 악이 어디에 가겠습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건을 가지고 왔는데 내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할까요? 도로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을 가지고 왔는데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이 가지고 갈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우리 성경의 교훈은 얼마나 적극적인지 모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통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 39절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일년 동안,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빛으로 어두움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공의로 불의를 이기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거짓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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